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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꿈지기의사랑 2025. 2. 23. 10:01

누가복음 9:57-62(참고 여호수아 1:1-9, 고린도전서 10:1-13)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주현절 일곱째 주일이면서 3.1절 기념 주일입니다. 작년 12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그로 인해 거기에 가담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국회와 법원 등에 나와서 그날의 일들에 대해서 증언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서 모르쇠를 시전하기도 하고, 부인하기도 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중에 탄핵심판에 나와서 증인으로 증언했던 한 대령의 답변이 인상이 깊었습니다. 변호인이 당신의 진술이 일관성도 없고, 위증하고 있기에 증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자 대령이 기회를 달라고 하더니 답변합니다. ‘저는 위인도 아닙니다. 저는 부하들의 지휘관입니다. 제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부하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일체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 그때 했던 제 역할을 진술할 뿐입니다.’ 그어떤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일에 합당한 자질과 자격을 갖춘 사람을 선별하고 선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 즉 제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합당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에 과연 우리는 합당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은 : 그 길의 험난 함

 

   예수님과 제자들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자라신 곳이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축출하시며 일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그렇게 갈릴리는 복음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 갈릴리 복음 전도는 거침이 없고,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돌연 그 방향을 틀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게 되었습니다. 갈릴리는 예로부터 변방이라고, 이방인의 땅이라고 멸시받고 천대받았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되는데, 예루살렘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이래로 언제나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거룩한 성전이 있는 도성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시는 길입니다. 즉 고난의 길이며,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우에게는 굴이 있고 새에게는 보금자리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 굴과 보금자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에는 집이 되겠지요? 집은 무엇입니까? 안전, 안식이라 할 수 있지요. 굴과 보금자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여우와 새들에게도 있는 굴과 보금자리가 인자에게는, 예수님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가 가는 길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길은 외롭지 않은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이해하는 이 없이 그길을 홀로 것는 것은 외로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이해해 주는 이가 없었기에 몹시도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것을 사마리아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것이죠. 기가 막힌 것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인데, 이렇게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세상에서 순례자처럼 사셨습니다. 유대에서 배척당하셨고(15:18), 갈릴리에서 쫓겨나셨으며(6:66) 가다라 지방에서는 떠나 달라는 부탁을 받으셨다(8:34).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가 그곳에 머무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9:53).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은 생활의 불안정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제자와 연관된 어려움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를 떠나 다른 마을로 가실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진실로 따르는 자가 없음을 아시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각오없이 일시적인 기분이나 공명심에서 제자가 되려는 사람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여우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헤롯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우의 굴은 헤롯의 화려한 궁궐을 빗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우가 헤롯이라면, 새는 또 누구를 말할까요? 새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새 중에서도 하늘을 나는 새라면, 독수리 같은 새겠지요? 그렇다면 로마의 황제나 총독을 암시할 수도 있겠네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결의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작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헤롯의 길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저 카이저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내 굴과 내 보금자리를 더 크고 더 안락하게 넓히는 길이 아닙니다. 아니지요. 人子의 길은 머리 둘 곳이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먼저 그 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먼저 가서 : 마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며 동행을 요청하시지만 그들은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들의 말에 공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입니다. 장사지내는 것,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는 것을 먼저하게 해달라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외로운 예루살렘 가는 길이죠? 곧 사명을 감당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또 다른 사람이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 했을 때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참 너무 매정한 말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매정한 분이셨다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은 그런 비장한 마음의 결단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 길은 저 헤롯과 카이저(황제)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 길은 출세와 성공의 탄탄대로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길입니다. 말 그대로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광야의 길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가 죽은 후 뒤를 이어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여호수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얼마나 비장한 마음이었겠습니까? 여호수아의 앞에 놓여 있는 가나안 땅은 광활했습니다. 광야에서 레바논까지, 큰 강 유프라테스에서 헷 사람의 땅을 지나 서쪽 지중해까지, 숨 막힐 듯 드넓은 땅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자신들을 메뚜기처럼 초라한 꼴로 만드는 강력한 거인족이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장애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길을 가려면 여호수아는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그의 가족,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가문을 내세워야 할까요? 아니지요. 여호수아는 두려워하지도 낙담하지도 말고,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다만 주 하나님만 따라가야 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율법을, 말씀을 따라가야 했습니다.("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리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바울은 그들이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다고 말합니다.("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1)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걸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떠나 불평하면서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이 있었지요.("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명이 중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고전 10:8)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모두 파멸하여서 오늘날 우리를 위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출애굽이 그랬던 것처럼 예루살렘 길도 다만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1919년 독립선언문에도 이러한 일사각오의 마음이 나옵니다. 일본이 1876년 강화도에서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조약을 맺은후 억압과 강포를 부려왔던 것을 규탄하면서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독립선언문 말미에 세가지 약속을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렇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2.8독립선언서에도 결연한 마음이 담겨있는데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굳은 마음의 결단이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9년에 2월에 발표된 대한 독립 선언서 전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올바른 도리를 실천한다면 이천만 동포와 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니

    어찌 한 몸을 아깝게 여기겠는가?

    한 집안의 재산을 모두 바쳐서 나라가 회복할 수만 있으면 나중에 삼천리 옥토가 모두 자기 집안의 소유가 될 것이니,

    한 집안의 재산을 서슴없이 희생하라.’

 

나를 따르라

 

   지금 예수를 따르고자 결단한 사람은 그 즉시로 모든 것을 단절하고 단호하게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심은 했는데 다시 미련이 남아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우왕좌왕하는 것은 예수님이 불을 지른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차갑고도 분명한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때로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교회냐 세상이냐 신앙이냐 물질이냐를 명백하게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결정할 때까지는 기도하고 숙고하고 의견을 묻는 길고도 깊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너무 섣부르게 결정하면 반드시 후회하고 미련을 못 버려 뒤를 돌아보게 되어 있다. 지금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서른 살 정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지금이야 서른은 청년이지만 당시 서른은 중년입니다. 하루가 급한데 주님은 왜 그렇게 나이 다 들어서 결단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긴 고뇌의 시간을 마치고 가야 할 길을 결단했을 때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나가서 광야로 갔고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도 더 이상 개인감정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나사렛의 목수, 남편 없이 살아가는 마리아의 아들로 회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죽음의 길을 포기하고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구원은 그렇게 해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복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고난이지만 마침내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를 것이라는 것을 믿기에 결단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는 더 이상 뒤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구원 받은 주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선택받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 바라보면서 죽을 힘을 다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쟁기를 잡고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밭도 못 갈고 농사도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쟁기를 잡고 앞에 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최선을 다해 주님 따라 가면 우리는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 결단으로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할 즈음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 안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던 때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었지요. 옛날 우리의 독립군들도 집을 떠나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가족과 絶緣(절연)해야 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기 위해서 자기 손가락을 잘라내고 자기 식솔을 잘라내야 하는 그야말로 斷腸(단장)悲痛(비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가족이 너무나 소중하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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