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4:25-35(참고 사무엘하 24:18-25, 사도행전 4:32-5:11)
들어가는 말
어제는 오늘 창립주일을 준비하면서 주변을 정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참여해주신 장로님들과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화장실이 막혔다고 해서 그곳도 뚫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나무를 전정해 주시는 분도 있었고, 본당을 청소하시는 분들, 주변의 잡초를 정리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전에는 더 많은 분들이 참여했던 것 같은데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편에서는 청소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이렇게 수고하는 분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었구나, 그리고 이분들과 같이 교회의 일을 내일처럼 여기는 분들의 땀과 수고가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118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교회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우내 칼끝과같이 찬바람이 불더니 오늘 새벽에는 제법 바람이 따뜻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마음도, 삶도 따뜻해지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무리와 제자의 차이?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병든 자들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또 귀신 들린자들도 많이 고치셨습니다.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예수님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속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누가의 말이 바로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시고, 걸어가시다가 문득 돌아서서 그들을 향해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선포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무리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러 나가는 단순한 행동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것 같지만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아파트가 있어도 내가 그곳에 들어가 살지 않으면 그것은 내것이 아닌 것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고난과 아픔을 함께 하기로 결단한 사람들 그들을 예수님은 ‘내 제자’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허다한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지만 참된 제자는 기쁠 때나, 슬플 때, 고난 중에서도 여전히 그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될 수 없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스타로스)는 로마시대의 극악한 범죄자나 노예에게 행했던 극형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수치와 고통, 불명예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조금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얽매이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지’라는 말은 감정적 미움이 아닌 상대적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이 당신을 따름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의 뜻을 추종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후일 왕이 된 다음에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믿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교만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위한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일로 인해 온 백성이 사흘 동안 무서운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는 벌을 받게 되었고, 칠만 명이 죽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삼하 24:13~15).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개인적 욕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군인의 수를 세고, 그 군대의 힘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그 어떠한 것도 두지 말아야 하는데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고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서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의 요건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도 아깝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예수님께서 주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전하는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고후 12:15)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적인 어떤 것을 얻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을 과감히 주님을 위해서 버리는 사람, 주님을 위해서 투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라는 말씀은 이들의 마음 중심에 성령께서 계시므로 성도와 성도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인 욕망이나 집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물건을 서로 함께 나누어 사용했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졌으며, 온전한 청지기의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 앞에 두었지만, 일부를 감추었습니다(행 5:2). 이들이 감춘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적은 양의 독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그 독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소유에 대한 집착을 장애물로 둠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이들은 끝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행 5:5, 10).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십자가를 진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지고’에 해당하는 말은 바스티제이(βαστάζει)입니다. 원형은 바스티조인데 ‘가져가다’, ‘나르다’, ‘운반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체적, 감정적 영적으로 무언가를 담거나 운반하는 것을 말하는데, 물리적인 짐을 지고 있거나, 부담을 견디거나, 누군가를 지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공동체적인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께서 짊어지신 사명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그 책임과 부담을 지는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보좌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모두 버리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함으로 한 발씩 내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모습이 때로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는 두 가지의 비유를 들어줍니다. 하나는 망대를 세우는데 계획을 가지고 세운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임금이 싸움을 할 때에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진다는 것입니다. 즉 두 개는 하나를 말하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서 동반되어지는 고난과 역경 감내할 결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와 말씀을 듣고, 자신을 개발하는 훈련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나가는 말
세상의 사람들은 자시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유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사람처럼, 자신의 모습을 녹여서 사라짐으로 세상에 참 맛을 느끼게 하는 소금처럼, 자신의 몸을 태워서 세상을 밝히는 빛처럼, 예수님처럼 우리의 것을 포기할 때 가능합니다. 만일 그 길을 걸을 수 없다면 우리는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맨살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온 생명, 물과 피를 쏟으며 남김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십자가를 짊어 지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 그 사명을 감당하는 책임의 짊을 함께 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누가복음 14:34-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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