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3-23(참고 미가 6:1-8; 야고보서 1:16-27)
들어가는 말
주현절 넷째주일이고 해외선교주일 아침입니다. 설명절 동안 고생하셨습니다.(서로 인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존재들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본다면, 여러 갈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갈래의 모양이든,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처지를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등의 위협이 있더라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인들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고 전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그리스도인들의 시작과 근본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의 시작과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과 그들의 역사 속에서 첫 열매로 삼으신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함께하시면서, 구원하시려는 뜻을 끊임없이 세상에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위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첫 열매로써, 하나님의 뜻을 만천하에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겠죠. 야보고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첫 열매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끊임없이 나의 현 위치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정진해야 하고, 또한 그 방향이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가는 길이라면, 용기 내어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7장 13절 이하에서 처음 만나는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하려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자세는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으로서 좁은 문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또 다른 문은 좁은 문이라 말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습니다. 그렇기에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Door)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이나 통로는 희망, 기회, 여는 것, 어떤 정황이나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정황이나 세계로 이르는 통로를 상징합니다. 특별히 열린문은 기회와 해방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멸망의 세계로 연결된 통로요, 기회입니다. 그 길은 크고 넓습니다.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편한 길을 갑니다. 그리고 죄를 지며 살아갑니다. 그 길은 우리에게 멸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길이 아닌 좁은 문(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동반되는 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마 16:24)
그 길은 협착하며, 그 길은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통로요, 기회입니다. 좁고, 협착한 십자가를 감내한 자만이 그 길의 마지막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좁은 문으로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비춰보려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의지가 죽고, 내 욕심이 죽고, 내 자랑이 죽고, 내 혈기가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 때 망설였다가도,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과 구원의 뜻을 따르는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할지라도, 그 문 너머를 볼 수 있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 문 너머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좁은 문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향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미가서 6장 5절a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아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했던 대답을 기억하라는 짧은 언급이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담긴 민수기 22장에서 24장까지를 보면, 발람이 어떻게 좁은 문을 택하고, 그 문을 향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가서에서 발락 왕은 다음 번엔 더 높은 고관들을 발람에게 보내면서, 복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며 백지 수표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발람은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 날 밤에 발락 왕의 요청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끼어있는 발람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가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고 하십니다. 모압의 고관들과 함께 발락 왕에게 가는 중에,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셔서 발람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도록 분명하게 하십니다. 드디어 발람은 발락 왕 앞에 갔고, 그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발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겠다고 발락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네 번에 걸쳐서 저주 대신에 축복을 하죠. 발람은 시험대 위에 놓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 왕의 요청입니다. 발락 왕은 명예와 높은 지위와 금은보화, 그리고 분노와 협박으로 회유하려 합니다. 발락 왕의 요청을 받으면 따라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명예와 지위, 금은보화입니다. 그리고, 발락 왕의 요청을 거부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시험대 위에 선 발람은 한 때, 명예와 지위와 금은보화가 좋기도 했을지 모르나, 결국에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하는 길”을 갑니다. 저주하는 자가 아닌 축복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선교란 그런 것입니다.
좋은 열매 맺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 신자와 참 신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열매입니다. 외형은 비슷해 보일지라도 그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 두 제품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제품의 품질입니다. 정품은 오래써도 그 품질이 변하지 않고 고장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짜는 쓰면 쓸수록 고장이 잘 나고,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금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진짜처럼 포장을 하고 외형을 꾸민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한 결과가 그것들이 가짜인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참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이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애를 써도 끝까지 처음 그들이 가졌던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기에 그들은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 헤이함을 보이고, 틈을 보인다면 사탄은 우리의 신앙을 넘어 뜨리기 위해서 여러가지를 동원할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 속에 어떤 열매들이 맺히느냐에 따라서 나는 참 성도인가 거짓 성도인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쁜 열매를 맺든지 아니면, 아예 열매 자체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즉 심판이 그들에게 임박하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주의 형제 야보고가 피조물 중에 첫 열매인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몇 가지 제시합니다. 성내는 것을 더디하고,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즐겨 하십시오. 사람이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내 혈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담긴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다고 여기시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않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이기도 하시고, 나그네와 장애인을 비롯한 우리 주변의 모든 약자들의 동일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은 말이 아닌 실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의 마지막을 삶으로의 실천을 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입술로도 하나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선교의 사명, 이방인을 향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동역하는 교회,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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