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6-18(참고 이사야 58:1-9, 고린도후서 7:2-13)
들어가는 말
지난주까지 주현절이 끝나고 오늘은 사순절 첫째주입니다. 부활절 전 40일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고난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부활을 기다리며 사순절을 지켜왔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선 사순절 동안 금식과 구제 선행을 했습니다. 특히 금식은 육신을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깨어진 세상의 실제를 경험하는 영적훈련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후 위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과소비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고 많은 생명의 목숨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하나님이 만든 세계가 얼마나 깨어지고 망가졌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묵상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금식이란
본문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3가지 경건생활의 교훈이 있습니다.(마 6장) 그 첫째는 구제요(마6:1-4), 둘째는 기도이며(마 6:5-15), 셋째는 금식입니다(마6:16-18). 이 세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하는 모든 삶의 기본원칙입니다. 구제는 이웃을 향한 성도의 올바른 삶이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이며, 금식은 자신을 향한 올바른 삶의 원칙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세번째 교훈인 금식이 자신을 향한 올바른 삶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금식이란 종교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목적을 두고 일정기간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인들에게만 있는 행사가 아니고 인도의 힌두교나 불교, 유대교 등에서 다양하게 해 오던 행위입니다. 고대의 종교의식 속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괴롭혀서 본능적인 욕망을 극복하는 일이 종교상의 도를 닦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금식입니다. 금식이란 본래 개인적, 국가적인 슬픔을 표현하거나 죄를 깊이 회개하는 태도를 보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어떤 공덕을 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에스더서에서도 민족이 멸절될 소식을 전해들은 에스더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더 4:16)
금식이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금식이 형식화되면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과시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스가랴 7:5-6) 외형적으로 슬퍼하는 척하는 것이 금식이 아닙니다. 진실로 내안의 죄를 슬퍼하고 함께 아파해 주는 마음이 드러나야 진정한 금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보이려는 것은 금식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 금식을 처다보지 않을 것이라 고 말합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이사야 58:3-5)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죄와 허물을 깨닫는 금식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형식만 갖춘 금식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고 주님을 위해 무슨 대단한 희생을 하는 양 당당합니다(2-3절). 당연히 자신의 죄와 허물은 되돌아보지 않습니다. 금식은 하지만 회개는 없습니다. 금식은 진실하신 하나님에게 경건한 기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에 의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해와 평화가 없는 것은 진정한 금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쟁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우리 스스로가 만들놓은 법을 무시하며 불법적인 계엄을 선포하고 법원을 폭력으로 강탈하고, 이것을 부추기며 자신들의 행위와 동조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것이 정의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길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을 조장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교회가 깊이 관여 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것을 지적합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이사야 58:4) 결국 누군가와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면서 하나님께 금식의 목소리가 들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합당하지 못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후서에서도 바울인 마음으로 누군가를 영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함께 죽고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화해화 평화란 이러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누군가를 배척하고 비난하고 험담하는 마음은 이러한 모습을 만들수 없습니다. 그들은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자신과 함께하는 공동체로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정죄하는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묶여 있는 관계가 될 때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어주는 관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회복하기 위해 바울은 쓴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들이 변화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비난이 아닌 사랑의 충고는 필요합니다. 이것이 때론 오해의 소지가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책망의 편지를 쓰면서 마음이 녹아 내렸지만 그로 인해 변화되어 가는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서소를 향해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 사랑을 나눔으로 화해를 이루어가는 것이 진정한 금식의 태도입니다. 주님 앞에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죄와 허물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참회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금식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경건의 모습과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 이러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광고하거나 자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철저히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의 경건을 자랑하고 싶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주의가 나에게 집중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가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저히 우리를 관리해야 합니다. 오히려 이것은 슬픔의 금식이 아닌 기쁨과 감사의 금식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과 같은 맥락의 얼굴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슬픈 기색을 짓거나 얼굴을 흉측하게 하는 그러한 금식과는 대조적으로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려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보이는 쇼와 같은 금식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우리의 삶을 보시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어주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린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헐벗은 자를 입혀주고 도움이 필요한 자를 피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며, 진정한 금식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금식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발적인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거나 사람의 기분을 맞추려는 의미로서의 신앙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은밀한 중에 계시면서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금식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교류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적인 욕망과 혈기를 죽이고 더욱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중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이러한 세상이 만들어 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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