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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마음으로

꿈지기의사랑 2025. 2. 22. 17:11

마가복음 10:13-16(신명기 4:32-40; 고린도전서 3:18-23/20250216)

 

들어가는 말

 

   오늘은 주현절 여섯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은 교회의 봄심방을 하였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처음부임했을 때 부임심방을 하면서 오전 오후에 걸쳐서 일주일 내내 심방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심방을 하면서 여러 구역을 함께 하는데도 한나절 하고 조금 더 하고 나니 심방이 끝이 났습니다. 그만큼 우리 교회에도 성도들이 급속도로 줄어가는 현상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정들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한 주 동안 심방을 위해서 수고한 장로님들, 심방대원들, 심방을 받느라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 해 동안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만져주심을 바라고 : 은혜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본문에 신체 접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아이들을 만져주실 것을 바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진다는 것는 말은 ‘ἅψηται’(합세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근동 시대에는 촉각이 중요한 의사소통 및 연결 수단이었습니다. 축복, 치유 또는 권력의 전달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번역에는 손을 얹었다’, ‘손으로 만지고 축복했다’, 번역합니다. 즉 만지는 행위가 단순히 만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병을 치료하기 위한 행위로서가 아닙니다. 마태복의 19장에서 기록하는 것처럼 아마도 예수님께 안수와 기도를 부탁드리기 위함입니다. 손을 얹음으로써 그 아이에게 축복을 비는 기도를 해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아온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부모나 랍비가 아이들을 축복해주는 행위는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자신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와선 만져주심(안수, 축복기도)을 바라는 부모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일회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혼나면서도 끊임없이 이런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계획했던 그 부모들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지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이어짐을 위해서 교육은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 날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특별히 하나님과 역사하심에 대해서 바르게 알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세대로 이어져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나온 역사를 잘 생각해보고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4:32) 지나온 역사를 상고해 보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일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의 육신의 만짐뿐 아니라 교제와 관계를 맺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후세대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지원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세워질 수 있도록 돕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3-35)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 : 우리의 고집스런 생각

 

   아이들을 데리고와서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꾸짖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장애인, 환자, 여자, 가난한 자등과 같이 별 가치없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그렇지 않아도 여러사람을 대하시며, 치유의역사와 말씀을 전하시는 일로 잠도 제대로 주무실 수 없고, 먹는 것도 변변히 먹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귀찮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해를 함께 동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의 진정한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일(피곤하고, 귀찮고, 힘겨운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이의 부모를 나무랬습니다. 즉 우리의 고집스런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3:20) 예수님에 대한 애정과 도덕적인 의무가 그들의 눈을 가려서 인생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스스로 지혜롭다 착각할 때 일어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를 사모하는 것 때문에 교만해졌고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힘입어 헛된 자랑에 빠졌으나 이제 그러한 현상에 쐐기를 박고 분열을 방지하라 합니다.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협력자 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1)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가진 세상의 시각 기능적인 면이나 실용적인 면이라면 어린 아이들은 생산하는 것이나 실용적인 부분에서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들은 가치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시는 예수님께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생명들까지 포용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어린아이의 부모를 꾸짖던 제자들을 향해서 노를 발하셨습니다. 그들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 역시 구원받고 축복을 받아야할 존재를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포용하심으로 그들도 구원받아야할 생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구원 사역에는 남녀노소 그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4) 우리가 가진 편견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로막지 않기를 바랍니다.

 

순진한 마음으로 : 환영하는 마음(δέξηται, 덱세타이, 환영하다 받아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 나라를 받드는 자들이라 말합니다. 당시 사회의 통념에 사로잡혀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 구원과는 관계없는 시끄러운 존재로 여기는 제자들을 향해서 그런 잘못된 편견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총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판단에 의하면 율법을 모르는 어린이는 토라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앞에서 아무 공적도 세울수 없는 존재로서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된 것임을 말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받든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작아지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버리고 자신의 특권을 버릴 각오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주신 은혜를 의심없이 받고, 거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어린아이들 조차도 구원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아이들을 안고 그 위에 안수 하시고 축복하셨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만지셨다는 것은 또 안으셨다는 것은 그들의 보호자와 쉼터가 되시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을 만지심은 그들이 이제는 버림과 소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예수님의 권속으로서 소속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제 어린아이들은 예수님과 육적인 교제 뿐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맺는 긴밀한 관계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이 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제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의 생각의 문을 열고 그들을 우리의 형제로 자매로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는 기도를 드리를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

 

나가는 말

 

   우리가 진정한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방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건지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차별하는 마음, 내 마음으로 누군가를 제단한다면 우리를 그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포용하시고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나라를 편견없이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는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누리를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오래 살리라”(신명기 4: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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