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1:10-14(참고 베드로전서 2:18-21, 누가복음 15:1-10 / 20240224 )
들어가는 말
어느덧 3월이 가까워오고, 비가 내리더니 따스한 햇살을 통해 봄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시간을 보여준 지난 한 주였던 것 같습니다. 한 주 동안 가정들을 방문하며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이면서, 일제로부터 해방을 소망하며 자유를 외쳤던 만세운동이 있은지 105주기를 맞이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3.1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흩어진 자를 모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대국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날마다 살아갔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먼 섬 즉 강대국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하고, 핍박하던 강대국을 향해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잘못)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너희를 통해서 흩어버렸지만 이제 다시금 회복하시겠다는 선포를 하십니다. 이제 목자가 그들을 모으는 것처럼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목자는 양들이 풀을 뜯게 하기 위해서 때론 그들을 우리 밖으로 내 몰아서 그들이 풀밭에서 있게 합니다. 어쩌면 그곳은 이리와 승냥이와 같은 들짐승들의 먹이가 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곳으로 양을 내 몰 때 목자의 심정도 그렇게 평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도 양 백마리를 가진 목자가 그중 한 마리를 잃고 99마리의 양을 광야에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으로 갔을 때의 마음이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들을 먹이기 위해서 그리로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목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늑대로부터 짐승들로부터 자신의 양을 한 눈팔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대국의 손을 빌어서 그들의 죄를 물어 그들을 흩어버리셨지만 이제 그들을 목자가 모음과 같이 모으시고 그들이 푸른 초장에서 풀을 먹고, 맑은 물가에서 물을 마심과 같이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이사야 40:11)
값으로 이루어진 사랑 : 생명을 향한 간절함
예화) 문용기열사 이야기-두 팔이 잘리면 입으로
익산 4.4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당시 솜리 장터라 불린 익산 남부시장으로 순국열사비와 문용기 선생 동상이 있습니다. 사실 익산은 일본군 정예부대인 보병 중대가 주둔한 지역이라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목숨을 버릴 각오로 독립만세운동에 나선 익산의 4.4만세운동을 후세에 높이 평가하는 이유인데요. 결국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문용기 선생은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다 헌병에 의해 태극기를 든 오른팔이 잘리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시위했으며 이마저도 일본인 헌병에 의해 잘리자 입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두 팔이 잘려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서도 문용기 선생은 "시민 여러분! 나는 죽어서도 우리 대한의 독립과 신정부의 건설을 위해 온몸을 바쳐 기도하겠소. 여러분을 대한민국의 신국민이 되도록 죽어서도 이 땅을 지키겠소."라며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다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잃어버린 사람들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억압되어있던 그들에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11절 “야곱을 구원하시되”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파다/פָדָה”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이 말은 몸값을 의미하는데요, 즉 ‘몸값을 치르고 구해냈다.’는 뜻입니다. 하반절의 ‘가알/גָּאַל’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속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파다와 가알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대구 형태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보다 강한 강대국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시겠다는 선포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종 되었던 삶으로부터 우리를 속량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시온의 성산에서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빼앗겼던 모든 것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에게 우리가 빼앗겼던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의 얽매임 속에서 죄책감에 싸여서 살아가던 인생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 모습으로부터 해방시키시겠다는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회복된 삶, 그 심령은 어떻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마음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로다” (12절 상반절)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모든 것들이 회복된 인생은, 그 심령은 겨우내 메말라 갈라진 논을 봄에 농사를 위해서 충분히 물을 댄 것과 같이 풍성한 삶에 대한 소망과 또 그러한 힘을 통해서 부족함이 없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케되고, 풍성하신 은혜를 덧입히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풍성해짐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6:22)
3.1운동과 그 후의 각지의 만세운동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이며 간절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베드로전서 2:19-20) 생명을 향한 간절함, 잃은 것을 찾기 위한 간절함이 역사를 움직이고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쁨을 함께 누리는 공동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값을 치르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죄의 권세 아래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값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에서도 목자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떠나야 하는 아픔과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온 산을 헤매며 치러야 했던 그 시간들 그것이 바로 변화를 위해 치른 값이었습니다. 11절의 의미도 같습니다.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몸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물댄 동산과 같은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을 위한 고난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해방의 기쁨은 3.1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그것을 위해서 희생한 독립운동가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러한 해방이라는 변화를 경험하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누려야 할 그 기쁨의 시간들은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고난의 자리에 그리스도인 된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건지시기 위한 예수님의 몸부림을 기억하고, 나라 잃은 아픔을 회복하기 원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값을 치르심이 오늘 우리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깨닫게 한 것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가는 말
3.1운동은 나라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상과 이념을 모두 초월하여 한 마음으로 모두가 고난인줄 알지만 함께 기쁨을 누리기 위한 사람들의 희생의 터전 위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36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해방의 기쁨을 누리며 함께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면 생각 없이, 의식 없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과거의 그릇된 잔재를 청산하고 바른 역사의식과 신앙관 속에서 이 시대의 고난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
이니라”(렘 3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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