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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는 것을 알리라

꿈지기의사랑 2024. 3. 6. 17:43

마태복음 11:2-15(이사야 44:1-8, 사도행전 5:29-42 / 20240128)

 

들어가는 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언제 생겨나는 것일까요? 삶을 지탱할 소망을 품고 사는 것에서 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이러한 소망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삶을 포기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화) 빅터 프랭클 이야기 -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기록한 자서전적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하튼 나는 신나게도 무려 담배 열두 개비를 바꿀 수 있는 쿠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담배를 수프 열두 그릇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고, 수프 열두 그릇이면 한동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kapo, 유대인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유대인들을 감시하던 나치협력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배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의 감동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자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프랭클의 말처럼 소망을 잃어버린 이들은 살아 있으나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위로를 전하고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2-3)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들을 듣고, 예수께서 메시아이신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한에게 이야기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4-5) 메시아의 사역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세상의 도래입니다.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나음을 입고 못 듣는 자가 듣는, 그리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세상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에게 생활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을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1:6) 여기서 실족하지에 해당하는 단어는 "스칸달리스데/걸림돌이 되다"입니다. 어원상 길 가운데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다란 뜻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떤 인격체로 하여금 그가 믿고 복종해야 할 자를 불신하기 시작하다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이러한 의미로 스칸달리조를 이해하면 어떤 장애물 때문에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를 의심하고 불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메시아 상'입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아가 구원 뿐만 아니라 심판자의 역할도 동시에 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그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역할은 하나님의 일에 대적하는 모든 것을 척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3:15-17절을 보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그러한 심판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조차도 자신들의 지식과 이해 관계에만 연결시켜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무엇을 보려고 : 선지자를 보려고

 

   증인이란 무엇인가를 목격한 사람(witness)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무리에게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7-9절에 보면 그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선지자를 보기 위해서 나간 것이라 말씀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선지자, 나아가 메시아를 요청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광야였습니다. ‘광야계시메시야의 구원이 선포되는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란 '연약하다.' '줏대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레요한은 그런 줏대없는 인물이 아님을 반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줏대없는 인간은 왕궁에 있는데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를 가리킵니다. 타이센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헤롯 안티파스의 동전에는 갈대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의 수도였던 티베리아스는 갈대가 많은 호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갈대가 그를 상징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헤롯은 자기의 행위를 비난하는 요한을 잡아 가두었으나 백성들의 동요를 두려워하다가, 결국 그의 딸 헤로디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솔하게 목베어 죽이고 말았다.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줏대없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칭찬하십니다.(9-11) 세례요한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경험했고,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선지자 보다 큰 자이며,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그 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

 

   그렇다면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천국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세례요한은 큰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그부도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데 그쳤으나 복음을 경험한 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을 위임받았다(1:8). 그런 면에서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직접 동참한 사람은 비록 지극히 보잘것없고 형편 없더라도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11:12-15) 무슨 말씀인가요? 천국을 침노해서 차지하는 것이라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라는 것은 무의미해집니다. 왜냐하면 나의 행위를 통한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맥락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는이라고 말씀하셨죠? 즉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 이전까지로, 천국은 침노하여 얻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로마 제국에서 유대민족이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구원의 개념이 더 풍성해진 것입니다. 단지 율법의 조문을 지키고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을 따르며 유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을 믿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우리의 구원자로 영접하는 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온 것이 세례요한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믿지 않기에 실족하는 일들이 있고, 어려운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냄으로 증거하는 증인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가는 말

 

   교회로서 우리가 할 일은 차별과 배제의 삶을 멈추고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사명을, 증인된 삶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절)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알렸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향해서-우리가듣고 본 것-그 복음을 전하는 증언자가 되어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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