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6:2-9
들어가는 말
지난 주에는 자신이 선포한 대로 금새 이루어 지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하는 모세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모세를 다시 부르(6차소명)시는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속에 나타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엘 샤다이 vs 야훼(2-3절)
오늘 이야기를 끌고가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미 3장에서 한 번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가면서 자주 나오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특별히 창세기 15:7에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때와 창세기 28:13에서 야곱과 언약을 맺을 때 나오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26:24-25절에서는 이삭이 자손의 번성을 약속받는 장면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세 족장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로만 안 것이 아니라 '엘 샤다이*'라는 이름으로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절) 즉 조상들은 두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모세(백성들 포함)는 그들과 다르게 야훼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상 시대에 야훼의 이름은 밝히 알려졌으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400여년 동안 그 이름을 모두 잊어버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조상시대에는 '엘 샤다이'를 '야훼'와 동일시하였지만 출애굽 시대에는 이 두 이름 모두 다 잊어버렸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야훼'로만 알려줄 터이니 이 이름나 부르도록 하라는 것이다.(이영재, 해방의 하나님)
야훼는 노예를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예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완전히 새로운 신앙이었습니다. 노예의 하나님께서 노예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법(시내산 언약)을 제정해 주신다는 것도 새롭습니다. 부족전통이나 지역전통이나 국가전통을 담고 있는 '엘 샤다이'가 출애굽 시대부터는 한 분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야훼'로 귀속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고 창조계를 파괴하는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십니다. 그 최종 목적은 창조계의 회복입니다.
나의 언약을 기억한다.(4-8절)
4절에서 하나님은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거류하는 땅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기로 언약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이행하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내 언약'은 은혜로 성립됩니다. 가나안 땅은 본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거류하던' 땅이 아니었다. 본디 가나안 땅에는 높은 성벽을 짓고 폭력으로 그 땅을 지배하던 가나안 부족들이 있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소유하던 영토나 고토가 아니었다. 땅의 소유권은 모두가 하나님께 귀속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거주하라고 허락하시는 그 땅이 바로 내 땅이 되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토인 것이다.
5절에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한다고 하십니다.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일하도록 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야훼께서 들으셨다. '나의 언약'으로서 창세기에서 맺은 언약은 모두가 '나의 언약'이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신 야훼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억하시는가? 6절은 모세가 전해야 하는 주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여호와(야훼)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서 너희를 속량하여" 야훼 하나님, 해방의 하나님이시다. 애굽의 강제 노동으로부터 그들을 해방하실 분, 권능의 손으로 애굽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백성 삼아 주실 분이 '야훼'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아브람에게 약속 하신분이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해방하시고 돌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는 일은 전대미문의 일이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목적이다. 언약은 창세기 17장에 주어졌다.(7,8절) 야훼는 강제노등을 당하는 히브리인 노예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아브람에게 이미 약속해주셨다. 그 약속을 하나님은 기억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 : 낙심한 마음과 가혹한 노동(9절)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그들의 조상을 통해서 주기로 약속하셨던 땅-노예들에게 자신의 땅을 갖는 다는 것은 자유와 풍요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여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해방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모세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9절은 그들의 마음에 대해서 '마음의 상함'이라고 설명한다. 지금까지의 노동도 힘이 들었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 그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노동이 더욱 가중되고 가혹해 졌다. 이 노동에 대해서 번역 본마다 조금의 차이를 보인다. '마음의 상함(קֹצֶר/ 코체르/실망,낙심)과 가혹한(קָשֶׁה/카샤/힘들다, 어렵다) 노역'(개역개정),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새번역), '무서운 고역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공동번역 개정), '용기를 잃어버린 데다가 너무나 고된 노예 생활'(쉬운성경)은 각각 번역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그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 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바로의 완강함이 그들에게 잔혹한 중노동으로 다가왔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기가 푹 죽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마음에 해당하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רוּחַ/루아흐/기, 기운, 영)' 루아흐는 우주만물에 가득한 하나님의 권능이다. 사람이 받아 사는 생명력이다. 이스라엘은 기가 죽어서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즉, 기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상실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 바닥이 나서 거의 낙심한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백성의 영성이 완전히 바닥이 난 까닭은 바로를 면담하고 나서 그의 권력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혼비백산하여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오는 말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그들의 낙심한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 만한 여력을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여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고난의 현실만을 바라보느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면 과연 우리는 일어날 수 있을까? 오늘도 우리는 코로나를 통해서 비롯된 경제, 사회, 정치, 모든 곳에서 고난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다. 이러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해방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샤 다이 : 샤다이라는 말은 '산/들판', 이라는- 뜻으로 전쟁의 신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힘과 권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이길 자가 없다 것이다.- 뜻과 '젖가슴'이라는 뜻-어머니의 젖가슴으로 표현되는 모성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으로도 번역이 되어집니다. 즉 어머니의 모성처럼 우리를 보호하시며,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오후찬양예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의 명을 받은 자 (0) | 2021.01.31 |
---|---|
끈질기신 하나님 (0) | 2021.01.23 |
모세가 원망함 (0) | 2021.01.10 |
모세와 아론을 원망함 (0) | 2021.01.03 |
진리와 사랑으로 사는 교회 (0) | 2020.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