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1-35(참고 신명기 6:1-15; 요한일서 3:11-24/20250406)
들어가는 말
스페인 태생의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가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역사를 반복한다” 우리는 과거라는 시간과 사건 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릇된 삶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역사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삶은 우리를 발전시켜 가는 것입니다. 지난 4일 우리는 또 한명의 대통령이 탄핵되어 파면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민의 지지를 얻었던 대통령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조기 퇴진하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벌써 4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기억하는 사순절기간이기도 하고, 익산에서는 3.1만세 운동의 연장선에서 4.4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탄압에 맞서 자주독립 국가로서의 자유와 자주권을 회복하려 생명을 던진 선진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때이며, 3.15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던 4.19혁명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4.4일 탄핵이 인용되는 일까지 우리가 기억해야할 역사적인 순간들이 너무 많은 달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주어진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새 계명? 사랑의 기준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와 같은 아픔이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바로 보고 평가함으로 우리는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아픔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역사를 기억하고 재평가함으로 역사를 바르게 알고 대처하고 변화시켜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 언급한 십계명의 기본 정신도 하나님을 유일한 창조주며 주권자로 인정하고,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구원자로고 믿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폭력과 혐오하는 마음이 아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령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란 하나님이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 3:11) 즉 우리가 들은 복음이란 결국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계명이 새롭다는 것은 그 사랑의 깊이, 기준,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실천하신 사랑의 본을 따르라는 구체적인 명령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하나님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계명이라고 언급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이 사랑에 대해 형제사랑이라고 하면서 가인과 아벨의 예를 들어줍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돌로 쳐 죽인 후 모른 체 발뺌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 제사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아 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먼저 내 제사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행여나 잘못된 것은 없는지 그 과정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벨 때문에 자신의 제사가 인정받지 못한다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를 경쟁의 도구로,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인데, 정작 가인은 제사의 본질 대신 하나님께 칭찬받고, 인정받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결국 그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은 동생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런 가인의 행동이 하나님께 속한 자의 행동이 아닌 마귀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행동이라 지적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입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 권면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주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 아닌 보혜사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인간의 정욕을 뛰어넘어 실천할 수 있다 가르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서로 사랑’의 길로 인도하사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세상에 드러나도록 도우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제자임이 드러난다는 것이 힌트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서북청년단의 마음처럼, 그리고 당시의 참혹한 참상을 감추고, 누군가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모습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지난 세월의 아픈 기억과 진실을 외면한체 살아온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책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이웃(형제)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도 그 사랑을 행할 때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구원받은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닮아가고, 행동하고, 증거하는 것이 선택받고,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란 스승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된 교회라면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말씀처럼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결단한 교회라면 이제는 우리의 잘 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긴대로, 우리의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온 생명을 다해 모든 것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혐오와 차별은 결코 상처를 치유하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남겨진 흔적을 줄일 수 있습니다. 아직도 가인의 논리로 차별하고, 혐오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하여, 우리 사회의 잘못된 차별을 막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꾼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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