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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나귀를 타고서

꿈지기의사랑 2025. 4. 20. 01:36

요한복음 12:12-19(참고 스가랴 9:9-12; 빌립보서 2:1-11/20250413)

 

들어가는 말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우리 교단에서 지키는 씨뿌림주일입니다. 식목일과 한식이 한 주가 지났고, 또 한 주 후, 부활주일에는 곡우입니다. 지금 농촌은 모내기를 준비하며 모판을 만들기 위한 씨 나락을 앉히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농촌은 이미 농사철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습니다. 그리고 4.19의거를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건조하고 먼지가 풀풀 날리더니 어제 내린 비로 인해서 먼지가 가라앉고 조금은 선선하지만 맑은 공기를 맡는 것 같습니다. 도로를 지나다보니 어느새 벚꽃이 활짝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주 전만해도 몽우리도 올리오지 않았던 꽃이 활짝핀 것을 보면서 생명의 기운 앞에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삶에도 생명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종려주일, 파종, 그리고 4.19

 

   종려주일과 파종과 4.19가 가지는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하자면 생명을 위한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화운동사전이라는 싸이트에 4.19에 대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4.19는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운동이었습니다. 419일 서울, 부산,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사망자만 거의 120명에 달했다. 그래서 당시부터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다.’ 대학생과 고등학생들 그리고 시민이 함께한 저항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파종이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씨앗이 희생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이러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파종이란 소망을 위한 희생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값진 희생을 통해서 생명이 돋아나고 열매를 맺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생명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뿌려지는 씨앗을 통해 생명이 돋아나고 결실하여 열매 맺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 파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려 주일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 그 사명을 위해서 죽음을 알면서도 십자가를 지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금 당장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파종과 종려주일과 4.19는 그런 마음을 담은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희생이 있던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우리가 종려 주일을 지키는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고 종려 가지를 까는 사람들

 

   종려나무는 다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고 자랍니다. 이런 종려나무의 특징 때문에 유인들에게 종려나무는 승리와 부활을 상징했습니다. 종려나무는 로마의 압제를 받으며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또한 종려 가지는 초막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초막절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을 해방하러 오시는 구원자를 맞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가 세운 헤롯 가문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불에 탄 종려나무 그루터기 같았습니다. 그 때 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그들은 예수가 세계 최강의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순례객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예수님 앞에 깔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궐기하면 기꺼이 따르겠다는 무언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시는 길 곁에 종려가지(승리와 해방 상징)를 손에 든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이 짧은 환호의 말 속에 사람들의 소망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2:18) 사람들은 특별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신다는 길거리로 달려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보았다고 하는 표적은 나사로를 살리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소식을 듣고서 예수가 오신다는 데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분이시라면 그동안 기다리던 메시야, 우리 왕으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로마에서 당하는 착취와 제사장들에게 받는 억압은 유대에 살던 시민들로부터 희망을 제거하였습니다. 사람에게서 희망을 삭제해 버린다면 뭐가 남을까요? 사람에게서 희망이나 사랑이 사라지면 남는 건 어둠입니다. 육체는 살아 있으나 그들의 영혼은 낡고 해져서 무덤처럼 짙은 암흑입니다. 그러다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계시다는 증언과 소문은, 한 줄기 빛으로, 다시 소망을 품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설레게 합니다. 그 빛을 따라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꿈틀거리며 다시 살아나려 합니다. 그래서 노래합니다. ‘호산나! ! 찬양받으소서.’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가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타고 오신 것은 나귀(어린)나귀였습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4)

 

   예루살렘 입성전에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분이셨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조국을 건져줄 메시아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메시아, 그들의 왕을 기다리다 만난 분이기에 그들은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대며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사아, 정치적인 왕, 강력한 권력과 힘으로 로마를 단숨에 넘어뜨리고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사람을 찾다가 만난 사람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십니까? 그들에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나귀가 '작은 것' 이라면 어린 나귀는 더욱 작은 것, 어리석고 작은 것이라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메시아가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스갸랴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니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 그들에게 임하게될 왕이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나귀라는 것은 안장이 지워지지 않은 나귀를 말합니다. 한 번도 안장을지지 않았던 나귀 새로이 누군가를 태워야 하는 나귀를 말합니다. 나귀는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오시는 새로운 왕이심을 상징하는 것이 어린 나귀라는 표현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왕이셨기에 백성들은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119:25-26)

 

나가는 말

 

   종려주일은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실, 새로운 세상, 생명의 세상을 꿈꾸며 자신들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을 담은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겹고 어려우며, 절망스럽고, 때로는 희생이 필요한 시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흘렸던 피가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해 주었고, 생명을 이을 또다른 생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려주일을 지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마음을 이어가는 것임을 기억하며, 생명을 주시기 위해, 승리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닮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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