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1-6(참고 이사야 30:8-18, 마태복음 23:13-28(20250330)
들어가는 말
우리 주변에는 표정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가 폭력에 노출되었던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얼굴에 표정이 없습니다. 제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수시로 감탄이 터져 나올 만한 참으로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표정이 없습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한 번도 웃어 본 일 없고,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듯한’ 「한하운/자화상」 표정 없음은, 여전히 70여 년 전 그날에 시간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용어에는 상처의 날이 흐르지 않고 계속 박제된 것을 포함합니다. 4.3을 대중들에게 처음 알렸던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끝내 생을 마감한 순이 삼촌의 죽음을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이미 그때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 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 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포로가 돌아온다는 7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멈춘 시간은 제주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국가 폭력에 노출된 이들에게 웃음도, 울음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처럼 오늘을 살아갑니다.
감각이 무뎌져 버린 세상
이사야 30장에서 이사야는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향 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멸망 당시의 기억이 박제되어 남아 있습니다. 더욱이 포로 생활하던 바벨론의 기억까지 합하면 70년 만에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청산해야 할 기억과 구습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36년의 기간을 보내고 해방된 조국에서의 우리가 가졌던 운명과 어쩌면 매우 흡사한 모습입니다. 유다 왕국은 멸망하기 이전, 국가적 위기를 군사력에 기대어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군대를 강화했고 외부적으로도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식 군대를 만들었고, 청나라와 일본, 아라사라고 하던 러시아와 그리고 저 물 건너 미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의 결말대로 그런 동맹과 군사훈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들 사이에 맺어진 밀약으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데 또다시 힘에 의한 평화를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어렵사리 해방된 조국이 두 쪽이 나는 중에도 북쪽은 소련에, 남쪽은 미국에 의지하여 끝내 사망에 이르는 또 다른 욕심이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국토 최남단의 ‘제주’ 땅에서 외세를 거부하고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제주 4.3 항쟁입니다. 제주 지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했고 실제로 제헌국회를 꾸리기 위한 반쪽짜리 단독 선거가 치러졌을 때,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2곳이 투표율 미달로 선거 무효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제주민들의 외세를 물리치고 완전한 독립과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운동은 꽤 오랜 시간, 국가가 심어놓은 반공주의 사상 아래 이른바 ‘빨갱이들’이 벌인 공산 폭동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진보하여 4.3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 시절인 2014년에 이르러서는 4.3은 국가추념일로 공식지정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보수 대통령이 집권하던 때에 4.3이 오랜 기간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국가가 기억하여 마땅히 추모해야 할,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법정 추념일은 두 날이 있는데 현충일과 4.3입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외형적으로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분들을 모두 기억하여 추모하는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가 잘 실현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갈등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특히 지난겨울 발생한 불법적인 계엄 사태로 인한 사회 갈등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때에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중심에 한국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동시에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시대적 예언의 사명과 혼란한 시기에 위로를 감당해야 할 교회는 일방에 치우친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심지어 폭력을 주문하고, 가담합니다. 이사야 시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이사야 30장 12-13절) 당시 권력 가진 자들은 듣기 좋은 말에만 귀를 기울이며, 바른 소리에는 귀를 닫고 말하지 못하게 억압했습니다.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이사야 8장 10절)
제주에는 ‘폭싹 속았수다’라는 인기 드라마의 제목처럼 제주만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 사람들만 그 뉘앙스를 알고 있는 관용구도 있습니다. “제주에는 배울 어른이 없어” 4.3 당시 글 꽤나 읽을 줄 알고, 앞장서 바른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한 연유로 생겨난 말입니다.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던 예언자들은 바벨론이 코앞까지 닥쳐온 때에도 우리가 안전할 것이라 노래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후에도 금방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성 예루살렘은 무너져 내렸고, 무려 70년이나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장기가 내려간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간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바른 소리 하던 사람들은 4.3의 광풍에 그렇게 사라졌고, 배울 어른들 없는 제주에는 표정이 사라졌습니다. 복음서 마태복음의 본문도 비슷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26절의 말씀이 참으로 뼈아픈데,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오늘의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예언하기보다는 스스로 더욱 돌아보는 ‘내적 선교’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잃은 맛을 되찾기에 애써야 할 때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는 눈먼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따끔한 말씀을 오늘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남한 지역에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졌을 때, 남한 지역에 개신교 인구는 통계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조선 전체를 따져도 0.5%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 산하 한국인 관리 60%는 개신교인이었습니다. 또한 정부수립 전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권력자들 역시 개신교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곳곳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주요 명령권자들과 실행자 중에 개신교인들이 다수였음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자유 대한을 수호한 영웅들로 추앙받아왔지만, 그 이면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남겨진 자들의 울음과 웃음도 빼앗아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대한민국을 병들게 하는 곳곳에 개신교인들이 자리하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의 23절의 지적처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의 나라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족을 모른체 만족에 빠진 교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한 세기가 채 되지 않아 책망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계시록 본문의 ‘사데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사데교회를 향한 책망은 마치 오늘의 교회를 염두 한 말씀 같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었다.” 건물과 형식만 남은 빈껍데기와 같은 교회를 두고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대한민국 밤거리는 교회 십자가 불빛이 가득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단일 종목으로 가장 많은 건물을 보유한 것이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빛과 소금의 역할은커녕 혐오를 부추기고 권력에 결탁하는 현 교회의 모습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하는 소제목이자 대사가 있습니다. ‘살민 살아진다’, 4.3의 광풍이 휩쓸고 남겨진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았던 날들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마치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그런 날들이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이들을 위로하고 품었어야 했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이들의 아픔을 돌아보고, 교회가 저질렀던 잘못을 돌이켜 사과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 교회의 상당수는 제주의 4.3을 공산폭동이라 색칠합니다. 몰역사적인 태도로 사실관계도 전혀 다른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믿고 유통합니다. 살았다는 이름만 있으나 죽은 것 같은 교회가 진정 살길은,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날을 보내는 이들을 위로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사데교회’에는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는 요한계시록 3장 3절의 말씀처럼 옷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그 사명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주는 해방이후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첫 번째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지역입니다. 몇 글자에 불과한 포고령에 희생된 사람은 적게 잡아도 3만 명에 이릅니다. 지난겨울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고는 믿기지 않는 계엄령을 선포한 이들은, 계엄을 선포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제주의 계엄령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표정을 되찾고 있던 제주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시간이 되돌려 지는 큰 충격이자 공포였습니다. 다행히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처럼 ‘과거가 오늘을 구했습니다.’ 이제 오늘이 과거를 구해야 할 차례입니다. 여전히 붉은 칠에 고통 받고 있는 이들, 70년 지났지만 표정 굳은 이들을 우리가 위로해야 합니다. 아직도 어딘가에 암매장되어 있는 억울한 죽음을 들춰서 마땅한 위령을 해야 합니다.
계시록 말씀에 바로 그런 자들이 생명책에 이름이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 권면합니다. 아니 강하게 명령합니다. 혹자들은 이번 계엄 사태의 가장 큰 피해는 교회가 입을 것이라 말합니다. 실제로 일반 대중들에게 교회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회성이 결여된 극우 집단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단은 한국 교계에서 유일하게 4.3 추모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살았으나 죽은 것같이 되지 않으려면, 이름만 남은 추모 주일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 우리는 보다 행함에 앞장서야 합니다. 제주의 4.3이 아니더라도 한국전쟁을 전후로 전국 곳곳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진화위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140여 개 시/군 중 114곳에서 민간인 학살 발생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표정 잃은 이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이미 메말라 버린 눈물을 또다시 쥐어짜는 혐오와 비난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과하고 전심으로 환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멈춘 시간이 흐르고 말랐던 눈물이 다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정수는 ‘부활’입니다. 죽었으나 살 것이라는 그 믿음, 그 믿음대로 행하시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주노회 윤태현목사님의 설교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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