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8-25, (참고 에스겔 47:8-12 /20250119)
들어가는 말
오늘은 예배력에 따라 주현절 둘째 주일이면서 교단이 제정한 여신도회 주일로 지킵니다. 여신도회 2025년 주제는 제109회 총회 주제와 같은 “교회여, 다시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노래하자”(에스겔 47:8-12; 시편 23:1-6; 로마서 8:18-25; 요한복음 14:6-7)입니다. 이 시간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5분 정도 여신도 관련 영상을 보고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나타날 영광
기후 위기, 고령화와 저출생으로 인구감소에 대한 걱정과 노후 복지에 대한 불안감, 스펙을 쌓아도 취직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고충 등 모든 생명이 힘든 시기를 보내느라 기쁜 마음으로 생명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하는 절망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게엄이 선포되고, 게엄해제를 하고, 대통령이 탄핵소추되고, 체포가 되고, 구속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좌와 우가 갈라치기 되어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환율은 상승하고 외교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합니다. 평화가 위협당하고 생명이 신음하는 지금, 교회가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쩌면 지금 하나님은 창세기 18장에서처럼 의인 열사람을 찾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 5:1)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한 사람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예루살렘은 멸망을 경험한 절망의 시대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 고난 중에 있습니다. 이 고난은 단순히 삶의 고단함에서 오는 고단이나 질병에서 오는 고난만은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싸워야 하는 고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금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탄식에서 희망으로 바뀔 때
19절은 이 고통 속에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를 간절히 “기다린다”라고 합니다. 이 절에서 두 단어를 주목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란 일반적인 교회 성도를 말하는 보편적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아니지만, 14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즉 “육신의 생각과 탐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명의 위기 중 가장 피부에 와닿는 문제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태 위기는 다름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알면서 이제 세상의 가치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피해를 본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드신 모든 피조물 자연 만물까지도 포함됩니다. 인간만이 죄의 종노릇을 하며 산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 조차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희망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합니다.(22절) 죄의 결과(탐욕의 결과)로 인해서 지금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이 함께 고통을 당하며 탄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를 받은, 구원과 부활을 위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있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 아니 오늘 우리도 탄식하며 산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피조물 조차도 자신들의 회복을 위해서 고통과 신음을 통해서 몸부림치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회복. 하나님의 구속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몸부림 쳐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다’로 번역된 희랍어 άποκαραδοκία(아포카라도키아)는 머리(καρα, 카라)와 주시하다(δοκεύω, 도케우오)가 합성된 단어로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간절한 기다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희망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부활의 처음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소망을 두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야기된 피조세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비움과 십자가의 영성을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기도 하며, 그 정체성이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을 호소하며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희망을 노래 합시다
그러나 이것은 눈으로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얻기에 우리는 그 소망을 붙들고 기다려야 합니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불가능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는 않을 지라도 오랜 기다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얻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독재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구원의 소망을 품고 그것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영육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기다림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 온 기장 여신도회가 생명 위기의 시대 생명을 살리는 부활 신앙의 희망이 되어주기를 기도합니다. 그곳에 평화 세상인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 속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과 별개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이 회복되기를 위해서 애쓰며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 그러한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아프더라도 돌이켜야 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탄식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희망으로 부르는 생명과 평화의 노래/기도> - (이영미 목사의 설교문 중)
우리를 공동의 집에서 살아가는 우주적 가족으로 지으시고, 창조하신 이 세계의 모든 다양성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를 통해 우리는 사랑과 양분, 보금자리와 보호를 경험하면서도, 지구와 깊이 연결되어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 방임과 학대가 기후 위기와 생물다양성의 상실, 인류와 모든 동료 피조물의 고통을 초래했습니다. 지구와 모든 피조물의 탄식,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희망과 정의이신 성령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탐욕을 버리고, 탄식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도우시고,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같은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오니, 우리에게 이 지구와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게 하소서.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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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총회의 이영미 목사님의 설교를 일부편집하여 총회여신도주일에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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