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13-17(20250105)
들어가는 말
푸른 뱀의 해인 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묵은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교단 총회 주제는 “교회여 다시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노래하자”(겔 47:8-12, 요 14:6-7, 롬 8:18-25, 시 23:1-6)입니다. 총회 주제에 맞춰 우리 교회 주제는 “예수의 생명을 나누고 평화를 이루는 공동체”(요한복음 14:6-7)입니다. 따라서 올해 주제 성경은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이러한 총회와 교회 주제 말씀처럼 올해는 코로나 이후에 다시한번 생명의 역사를 전하는 교회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주제를 가지고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곳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과의 삶이 연결되어지는 교회로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몸부림입니다. 이 시간 말씀 속에서 이러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태복음 3장14절과 15절에는 요한과 예수님의 짤막한 대화가 나옵니다.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온 예수님을 보고 요한은 당황스러워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여기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義)를 이룬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그분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인간 구원입니다. 그런데 세례가 왜 하나님의 뜻, 즉 그의 구원을 이루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건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을 요 1: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소위 성육신(incarnation)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과 동일한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는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5-11절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세례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받치고 있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죄의 씻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결단해야만 했습니다. 그 운명은 십자가입니다. 그걸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마 16:21-28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할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뜯어 말렸습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당연한 겁니다. 고난과 죽음은 메시아로서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거부할 수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습니다. 세례는 순종과 똑같은 말입니다.
세례를 받으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세 가지 현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하늘은 늘 열려 있기에 따로 열리는 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늘은 생명이 가득한 어떤 세계를 가리킵니다. 하늘은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이 숨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주기도의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은 비밀스러운 생명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생명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는 건 예수님이 하늘에 속했다는, 또는 예수님의 본질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도 어떤 궁극적인 사실을 말하는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세상의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는 능력입니다. 창조의 힘과 종말의 힘과 부활의 힘은 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생명은 불가능합니다. 그 영이 예수님에게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즉 구원이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인 하늘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를 생명과 진리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 소리를 이렇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세 가지 현상은 예수님의 운명 전체를 통해서 제자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신학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행한 모든 것들, 모든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린 것이고, 성령이 임한 것이고, 소리가 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
하늘로부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시편 2:7절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 대한 예언과 이사야 42:1절의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한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을 함께 묶음으로, 바로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구약의 옛 언약의 성취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앞에서 설명드린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심으로 인간의 삶속에 들어오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와 동떨어지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아픔의 현장으로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와 같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움을 경험하심으로 죄악 속에 허덕이는 인생-"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사 66:18)-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으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절망과 고통속에 있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보좌가 아니라 낮은 인간의 삶속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신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장면이 본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생명-"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요한계시록 21:23)-으로 인도하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빛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들어가게 하실 분이라 선포합니다. "무엇인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오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요한계시록 21:27) 그분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보좌로부터 흐르는 은혜의 강(생명수의 강)의 물입니다. 그 은혜가 흐름으로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선포합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 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2)
나가는 말
2025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올 한 해의 우리의 삶 앞에는 여전히 인생의 고단함과 고난의 삶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그러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교회가 그 사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을 증거하는 교회로서 다시한 번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이사야 66: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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