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1-7(참고 요한계시록 3:14-22, 누가복음 3:1-17)
들어가는 말
여기저기서 기후변화로 인한 사망과 사고의 소식들이 들려진 한 주였습니다. 우박이 떨어지고, 빙판길로 인한 사고들도 여기저기 발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림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당에 오신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절 앞 4주 동안이며, 오해는 12월 1일부터 대림절기가 시작합니다. 이 절기 동안에 이미 우리에게 오셨고, 장차 다시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겠습니다. 대림절은 회개와 성찰의 시간입니다. 대림절을 그냥 촛불 장식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지난 한 해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욕심에 이끌려 살면서 부끄럽게 살아온 것을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회개는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해야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사를 보내신 이유 : 신앙인 답게
예화) '나에게 인간답다는 말의 본래의 의미는 역지사지를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나의 곁을 일부 내어준다는 의미이다. 그 과정에서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으나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약한 자를 볼보는 것은 나 또는 나의 가족도 그 입장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비하는 것과 같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어떤 입장에든 처할 수 있으며 예측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타인을 보듯 나를 보며 나를 보듯 타인을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다.' 윤지원 <영화에서 건져올린 질문으로 글쓰기> 나에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은 어떤 의미인가? 中에서
인간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윤지원씨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은 독불장군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자신만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의 입장이 되고, 때로는 누군가를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 부분들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딪히게 되는 것이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며 살 것인가? 그냥 내 중심대로 살것인가?입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지 100년도 넘게 지났지만 전혀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레스 왕에 의해 성전 재건을 허락받고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에 의해 약 16년 동안 공사가 중단 되었다가 다리오왕 때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주전 516년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다리오왕 6년인 주전 515년에 성대한 성전봉헌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로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의 지파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를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대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에 대한 예배(제사)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이스라엘은 형식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번거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갔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들마저도 율법을 어기고 의로운 길을 떠나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저들을 강하게 질책하고, 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했습니다. 그 때에 나타난 선지자가 말라기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제물로 드리는 짐승은 온전한 것이어야 함에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성전에서 파는 온전하지 못한 짐승도 받아주며,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또 당시 백성들의 삶과 신앙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관이 아니라 우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렸느냐며 발뺌만 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끝까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보여줍니다. 1-6절은 주의 사자가 와서 주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공의롭게 행하실 것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나님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희생과 불편을 감수할 인간다움, 하나님의 백성다움, 신앙인 다움을 잃어버리고 쉬운길, 폭력의 길, 짐승과 같은 본능에 이끌린 삶, 공의를 잃어버린 삶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막기 위해 ‘내 사자, 언약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믿음은 말이 아닌 삶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使者)를 먼저 보내시어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이”하여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고, 예루살렘의 예배를 회복하도록 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증언 하는 자, 일꾼들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를 잘못을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허위(虛僞)에 속지 않으십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척하면서도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어쩌면 이러한 책망은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책망으로 들립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앙을 매우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며 형식적으로 예배하거나 마지못해 예배드리면서 탐욕스럽게(본능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도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사자를 보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17-19) 믿음이란 단지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동반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 통해서 들려진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그리고 그 예시로서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1-14) 여기보면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세례란 회개하고 용서함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예식에는 삶의 결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실 길을 준비합시다.
이미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우리가 대림절을 온전히 보내는 것은 우리의 삶을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로운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2000년전 오셨다면 우리에게 다시 오실 주님은 구원의 주가 아닌 심판의 주로 오십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 길을 곧게하기 위해서 보낸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말라기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하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 3:3-6) 옛날 예수님 오시기 전 타락한 신앙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문두드리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19-20)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응답이야 말로 진정한 길을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준비를 하지못한다면 금을 연단하는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은 하나님의 심판(말 3:2)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시고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 주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정신차리고 회개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로운 삶의 자리로 돌아가 교회다운 교회, 신앙인 다운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 7절에서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고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2024년 대림절을 맞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깊이 새겨듣고 다시금 우리들의 신앙을 바르게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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