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1-11( 20241204)
들어가는 말
우리의 삶에 죽음은 언제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슬퍼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또한 상실을 경험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절망하는 당시의 성도들에게 우리에게는 먼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분 안에서 믿음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살아야 함을 말해줍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주 안에서 함께 하는 때가 찾아올 텐데 그 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고 우리의 인생가운데 함께하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성실히 살아가며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도 바울의 편지를 묵상하며 다가오는 주님의 날을 어떻게 대비하며 살아야 할지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다가오는 주의 날 : 갑자기 임할 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를 향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처럼 그 때와 시기를 알려고 하거나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때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울도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재림의 때는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마 24:36). 확실히 예정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반드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시간은 분명히 찾아온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인지 알아낸다고 하거나 언제인지 말하는 것은 헛수고요, 진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그러나 주의 날에 대한 힌트는 있습니다. 주님의 날은 도적같이 임합니다. 도적이 온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오직 도적 자신만이 압니다. 그가 도적질하기 적합한 때라고 생각할 때 올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때 그날은 올 것입니다. 본문에는 밤에 온다고 말합니다. 밤은 죄가 만연한 때입니다. 밤은 모든 선한 활동을 멈추는 때입니다. 어두움이 지배하는 때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기에 피할 수 없습니다. 밤은 모든 것들이 쉬는 때, 안연한 때입니다. 모두가 아무일 없을 것이라며 안전하다고 여기는 시간입니다. 심판의 날은 바로 그때 온다는 것입니다. 도적이 모두가 안심하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와서 우리의 것을 강탈해 가는 것처럼 주님의 날도 우리가 준비하고 있지 않은 바로 그때 임하게 됩니다. 임산부의 산고가 갑작스럽게 찾오듯 찾아올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때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할 수 없으리라"(3절)
불신자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갑자기 임하는 심판을 피하지 못하지만 빛의 자녀인 우리는 주의 날,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낮에 속한 자들이기에 그것이 더이상 숨겨질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들에게 주의 날은 절망과 멸망, 심판의 날이 아니라 희망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날이 도둑같이 예기치 않은 때, 해산의 고통처럼 갑자기 임한다는 사실뿐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표현은 ‘잠든다’인 ‘카테우도’에 그렇지 않다는 뜻의 “μὴ”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성경에서 "카테우도"는 본래 일반적인 잠이든다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넘어선 표현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둔함이나 태만함을 의미할 수 있으며, 개인이 신의 뜻이나 그의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영적 태만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는 길은 그 시간을 미리 알려고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그때가 될 것이기에 항상 깨어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온갖 세상의 죄악에 취해 정신을 잃고 살아가고 있기에 바울은 교회를 향해서 깨어 있어서 근신하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각성하여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갑주를 입어 갑옷으로 무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영적인 갑옷을 입으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는 것입니다. 호심경이란 고대 전쟁에서 군인들이 착용했던 방어구 중 하나로, 주로 가슴과 배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호심경은 단단한 금속이나 가죽으로 제작되었으며, 전투 중에 적의 화살이나 칼로부터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주로 금속으로 만든 호심경을 착용했는데, 이 호심경은 체인 메일(사슬갑옷)이나 금속판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에게 철로된 호심경이 있었다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우리의 심령을 지킬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슴에 붙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믿음과 사랑을 새김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투구는 고대 전투에서 중요한 방어구 중 하나로, 머리와 뇌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소망의 투구"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확고히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판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을 통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세워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0-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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