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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하여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

꿈지기의사랑 2024. 6. 9. 11:45

누가복음 14:15-24(참고 호 2:14~23, 고전 1:18~25)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후셋째주일이면서 교단이 정한 총회 선교주일입니다. 총회가 하는 모든 분야의 선교를 위해, 교단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기도하고, 응원하고, 우리의 정성을 모으는 주일입니다. 우리 교단은 국내외의 여러 분야에 선교적 지원과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척과 미자립교회선교’, ‘평화ㆍ통일선교’, ‘생태환경선교’, ‘사회복지선교’, ‘인권선교’, ‘군선교’, ‘병원선교’, ‘학원선교’, ‘장애인선교’, ‘이주민선교’, ‘농어촌선교등 다양한 선교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번 선교주일을 홍보하는 영상을 보니 미자립교회를 지원하는 사역 중에 미자립교회에 악기를 지원하는 것이 있는데 악기를 지원받아서 성도들과 함께 악기로 찬양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교는 우리가 해야 할 예수님의 당부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아름다운 사역이고 힘을 일은 이들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선교하기 어려운 시대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정작 선교는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전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자료를 보니 비종교인들의 인식에 관한 자료였는데, 종교가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필요는 하지만 절실하게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선교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누가복음 14:12-13은 이렇게 전합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즉 교회의 관심이 소외된 계층이 아니라 부유함으로 표현된 우리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가 도와야 할 이들에게, 교회가 관심갖았어야만 하는 곳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초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이러한 현상이 지속됨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교회의 현상들로 인해서 가나안 (믿음은 있지만 교회는 안나가는 성도들)성도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교육이나 선교의 방향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 딱 이 시대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린도는 철학(이성)이 매우 발달한 도시입니다. 사람들이 매우 이성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 곳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합리적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십자가로 이루는 구원입니다.

 

   철학적으로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제기하지만 바울은 명확하게 해결되는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니 고린도 사람들과 헬라철학자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미련한 자의 미련한 행동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의 상황으로 돌아와보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사람들에게 그 잔치가 매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누가복음 14:18-20)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

 

   우리의 현실이 어렵다고 우리는 그럼 선교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초대받고서도 오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와 같이 하나님의 천국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서신서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늘 분열을 일삼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와 무할례, 바울파냐 아볼로파냐, 이성주의냐 신비주의냐 등. 사실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을 떠나기 직전,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분쟁 소식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고 권면하고자 고린도전서를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은 문안 인사를 한 후,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고, 교회의 분열을 지적한 후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주어야 합니다.(14:15) 그것이 교회의 사명인 선교입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매사에 부정적이며 자신이 지혜롭다고 교만을 떱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을 폐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교회는 더이상 자신이 지혜롭다는 교만에 빠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세상의 사람들이 그러한 교만이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교회도 세상 사람들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의 주인도 잔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4:21-25)

 

   무슨 뜻일까요? 초청받은 사람 대신, 거리와 골목에서 길과 산울타리로 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 자리에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믿음을 저버린 이스라엘 대신,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누가의 신학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 그러나 제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헛똑똑이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뭣이 중헌지 모르는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그들을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 ‘헛된 지혜자어리석은 총명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호세아 2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바람둥이 같은 여인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바람둥이 같은 여인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고, 당신의 말을 그의 안에 넣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았던지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한다.”(2:14)고 합니다. 여기서 타이르다는 미혹하다, 유혹하다는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심정을 구구절절 다 말로 표현하면서 감추지 않습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2:19~20) 그들을 깨닫게 하시려는 애타는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애타는 마음입니다. 비록 우리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의 복음을 들을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리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신뢰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 순위가 가치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에만 몰두하여 우리의 신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물질/기복)이 우리의 신이 되거나, 우리의 이웃을 외면한채 우리만의 리그에 빠지게 된다면 교회는 사회로부터 더욱 불신 당하게 될 것이고, 그들과의 소통 부재로 인해서 더이상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기뻐하며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진정한 잔치(예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떠난채 자기 중심에 심취한 교회를 더이상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14:21)

 

   우리가 진정으로 알기를 기뻐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배라는 잔치를 통해서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거친들과 같은 세상, 아골골짜기와 같이 사망의 그늘로 가득하던 우리의 삶에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호세아 2:14-15)

 

나가는 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증거해야 할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 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00:3)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된 창조주이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주실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복임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바른 신앙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우리의 이웃을 향해서 나아가 흩어진 교회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교회가 됨으로 다시금 교회의 신뢰가 회복되어지고, 하나님께 잔치의 참된 기쁨과 맛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명 나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의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