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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꿈지기의사랑 2024. 6. 16. 10:03

룻기 1:8-18(참고 갈라디아서 3:23-29, 요한복음 4:7-26)

 

들어가는 말

 

   6월도 어느덧 중순을 넘어섰습니다. 차를 타고 길을 다녀보면 텅 비어 있던 논에 모들로 가득한 것을 보면서 지난 한 달간 비지땀을 흘리며 수고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에게 인사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익산시의 등록 외국인 수를 보니까요?  2021 3월 말 기준 익산시에는 총 57개국 출신의 총 4,540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최근 기록을 보니 7천여명으로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우리 사회 속에는 그들에 대한 차별과 같은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며칠전 시사프로그램에서 수년동안 공장의 외국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성추행을 해온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 속에는 여전히 그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조금더 하나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부터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모압지방으로 이주해 간 한 가정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나오미는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해간 이주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서 고향 땅을 떠나 낯선 땅 모압으로 이주해간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는 여호수아 다음부터 사무엘 전까지의 시대로 주전 1,400년 경부터 약 300년간을 말합니다.  사사(士師)시대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의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 곳에 큰 흉년이 들므로 엘리멜렉이 아내(나오미)와 두 아들(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移住)하였습니다. 그들은 흉년으로 인하여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곡식이 풍성한 모압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엘리멜렉은 육신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다 베들레헴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두 며느리를 얻는대신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약속의 땅을 떠난 엘리멜렉의 가정은 얼마 후에 가장(家長)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모압 여인(오르바와 룻)과 결혼까지 하였으나 무자(無子)하고 모압 땅에 거한지 10년 즈음에 죽었습니다. 남편들은 모두 죽고 과부 3명만 남게된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방 땅에서 얼마나 비참하고 힘겨운 삶이었을까요! 여러 해 후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땅 베들레헴을 권고하셔서 비를 내려 주시고 풍년이 들게 하여 주셔서 양식이 넉넉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나오미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한 나오미가 이제 옛날 신앙의 자리,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자부와 함께 길을 떠나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던 중에 두 자부에게 모압 땅 자기들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돌아가라고 한 것은 억지로 따라오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자부를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가면 원망과 불평만 하여 피차 손해만 보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겪었던 이방 땅에서의 힘겨운 삶을 자부들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과의 갈등

 

   유다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는 나를 따라 유다로 가지 않아도 된다. 친정인 모압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뤘으면 좋겠다. 나오미는 시어머니로서 며느리들을 배려하고 행복하길 원하는 진실한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러자 룻과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들고 크게 울면서 아닙니다. 우리는 고향인 모압이 아니라 어머님 가시는 곳에 같이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11절에는 나오미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옛날 이스라엘에는 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형의 족보에 올려주는 그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내 생명이 자식을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이 죽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었고, 혹시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그 동생들이 죽은 형의 대를 이어줘야 한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이제 그런 자식도 없고, 이방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하는 땅에 며느리들을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도 이방인과 갈등을 겪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로 수가성의 여인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유대 지방에 체류하시다가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던 도중, 사마리아 지방 수가 성을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생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마리아 지방의 한 여인과의 만남을 넘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참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하나인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여인간에 나오는 대화속의 남편은 당시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했던 나라들을 상징합니다. 이전 다섯 나라는 앗수르와 바벨론, 페르시아와 알렉산더 제국입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왕국)와 셀류커스 왕조(기원전 31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존속했던 서아시아 일대의 헬레니즘 계열 왕국) 그리고 현재의 남편이라는 것은 당시 통치자였던 로마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뿌리 깊은 적대감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사마리아가 기원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자, 일부 주민들이 추방당하고 이방인들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족이라는 이유로 배척합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골 깊은 반목과 갈등이 근본적인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뒤, 통일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남 유다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분파주의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나 룻은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고 결심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붙좇았습니다.  룻은 시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였는데, 그 하나님이 너무 좋고 즐거워서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었고, 자기 백성인 모압 사람들보다 하나님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더 좋아 보이고 또 육신의 어머니보다 신앙의 어머니가 더 좋고 육신의 남편보다 하나님이 더 좋고 하나님 섬기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떠날 수가 없었다.  하나님 섬기는 성도가 너무 즐겁게 보여서 자기의 신과 자기의 고향과 자기 백성을 떠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기 위해 시모를 따라 가기로 결심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신앙의 본질에 다가서게 합니다. 외형적인 모습으로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과 습관과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신앙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배재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예배에 관한 대화속에서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넘어섭니다. 또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민족성도 넘어섭니다. 오직 영과 진리, 곧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예배,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령(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진리)대로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것이 참된 예배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의 골을 넘어선 진정한 화해의 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

 

나가는 말

 

   때로 우리는 외형적인 것에, 그리고 우리의 전통이라는 것에 파뭍혀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본질을 상실한 모습으로는 사람도 세상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방 여인이 아닌 사랑하는 가족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녀는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게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우리 안에도 이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