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23-3:6(참고 창세기 2:1-3, 로마서 14:1-12)
들어가는 말
오늘은 신학교주일이면서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명절 후유증으로 많이 피곤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모습, 어떤 상황에서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오셨더라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과 삶이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명절은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명절이 되어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저 먼 거리를, 긴 시간과 많은 돈을 투자해서 찾아오는 것일까? 아마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마도 고향을 통해 그리고 가족을 통해서 얻어지는 힘과 용기와 위로가 그 모든 것들 보다 크기게 그것을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이 곳에 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성경은 무엇이라고 답해줄까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행복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인데,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잘 존재함(well-being)’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잘 존재함’이라는 말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잘 존재하는 것, 행복한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는 존재의 목적을 갖습니다. 예컨대 칼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를 자르는 것이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능을 잘 발휘하여 존재 목적을 잘 수행해 내는 칼이 잘 존재하는 칼, 좋은 칼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잘 존재함’(행복)도 인간의 존재 목적을 잘 수행할 때 잘 존재하는 인간,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안식일 논쟁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에 대해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곳은 창세기 2:2~3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 마지막 부분 제 7일째 되는 날에 하시던 모든 것을 멈추시고 하셨던 것이 바로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날은 ‘하나님께서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이에 대해 신명기 기자는 이렇게 안식일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명기 5:14-15) 즉 안식일의 목적이 쉼이라 설명합니다. 차별없는 쉼, 종살이의 고달픔으로부터의 쉼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쉬시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존재서가 아니라 쉼을 통해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적을 상실한 안식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라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노동을 금한 안식일에 밀이삭을 자라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책망한 것입니다. 비난합니다. '보시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에는 노동과 오락(“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사야 58:13)과 매매를 금하고 있습니다. 불을 피우거나 과도한 여행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안식일은 영육의 쉼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의 행위는 엄연한 법규 위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관심이 달랐습니다. 그들을 변론합니다. 다윗이 사람들을 공궤하기 위해 떡을 취한 사건입니다. 게다가 안식일에도 자신이나 자신의 가축을 위해서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참 목적은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규정 자체에 그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규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종이나 짐승일지라도 오히려 생명을 아끼고, 생명이 생명으로서의 역할을 할수 있도록 돕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23절에서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고 그저 ‘길을 열며’ 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마태복음 12:1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즉 그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규정을 어긴 것에 시선이 가 있기에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사람들과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지만 주님은 생명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새번역)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에 벌어졌던 두 논쟁이 결국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처럼 결정하기 어려운 순간에 봉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시선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생각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자 애써야 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자, 고발하려는 무리가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는 그를 회당 가운데 세우시고, 지켜보는 무리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4절). 예수님은 완악함으로 침묵해 버리는 무리를 향해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이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시니, 손 마른 사람의 내민 손이 즉시 회복됩니다.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정치 세력인 헤롯당과 결탁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안식일은 죄를 짓지 않으려 조심하는 날이 아니라, 복음으로 선과 의를 실천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기준이라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에 명절이 되면 많이 부딪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제사의 음식을 먹는 부분들입니다. 제사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것으로 인해서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로마서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한 말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먹는 것도, 또 무작정 먹지 않는 것도 바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상을 섬기던 제물을 먹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믿음이 약한자를 위해서 포기했다면 그것도 맞고, 그것이 이방제사의 음식인 줄 모르고 먹었다면 그것도 맞다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다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이며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이러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
나가는 말
누군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벌어졌던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라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갈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비난하고 무시함으로써 공동체를 파괴하기 보다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가 합력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름 속에서 동일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일으키기 위해서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그런 큰 신앙을 소유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은 안실일에 이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마가복음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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