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26-38(참고 이사야 45:18-25, 로마서 15:4-13)
들어가는 말
오늘은 대림절 두번째 주일이면서 인권주일, 성서주일이기도 한 날입니다. 둘째 주일의 촛불은 회개와 평화의 촛불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께서 오셔서 만드실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하나님 나라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화단에 심어놓았던 능소화가 한참이 지나도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화단에 볕이 안 들어서인가 싶어 뿌리째 파내어 볕이 잘 드는 화단을 가진 지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봄에, 화단에 능소화 싹이 올라왔습니다. 여름이 되자 꽃을 피웠습니다. 흙 속에 뿌리가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뿌리가 살아있는 한 모든 일이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능소화라는 꽃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는 꽃이라고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능소화는 '희망과 기대'를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능소화는 희망을 전하거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 그리고 위로가 함께 하는 시간이기를 소망합니다.
상처입고 살아가는 인생
성서 속에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는 수많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유대의 역사에보면 기원전 606년(여호야김 4년)∼536년(고레스 3년)까지 유다 민족은 70년간 고난을 당하였으며 포로의 설움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은 살아가는 것이 고단한 상처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온갖 시련을 겪어 온 이스라엘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들의 현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다윗 가문은 '메마르고 죽어가는', 아니 베어져 둥치만 남은 사애였습니다. 어떤 희망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습다. 이것이 이사야가 말한 '이새의 뿌리'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암담한 현실 앞에서 '다 끝났어' 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사탄은 희망이 없으니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속에서도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유다민족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 치하, 식민지이자 남쪽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갈릴리 나사렛이란 곳의 이야기 입니다. 갈릴리는 이방의 땅(사 9:1, 마 4:15)이라고 불릴 말큼 유대 지방에서 볼 때는 소외된 변두리 지역으로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요 7:52) 갈릴리 사람 하면 곧 저항자 불온분자로 낙인이 찍힐 정도였습니다. 이곳은 60여 년을 이방인들에게 점유되어 분단의 비극과 설움을 받은 지역입니다. 예루살렘의 눈에 의해서 멸시받고, 경제적으로는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농촌이 거의 착취당함으로써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요 1:46)”라고 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동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마 2:1),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국가적인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불리울 만큼 흠이 없이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인이었지만 자녀를 갖지못하는 아픔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처 투성이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천사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마리아
이사야 선지자도 절망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이사야 45:20-21)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오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그를 통해서 자신들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실 것이라는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편 72편에는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시 72:4-7)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의 혈통가문의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은혜받은 자여(κεχαριτωμένη/케카리토메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호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호의를 통해서 선택된 사람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무엇인가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셨다는 전적인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잉태하는 사명(죽음과 멸시 견디는 자리),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은 마리아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연약한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과연 마리아에게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위로의 소식이었을까요? 마리아의 반응을 본다면 이것은 결코 위로가 될 수 없고 기쁨이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천사의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29절)라고 생각했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30절의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어쩌면 이 놀람과 무서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의 결혼 전 잉태도 유대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는’ 일이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34절) 마리아로서는 억울 하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이(하나님)의 능력이 덮으면 가능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그릇으로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
마리아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 속에 있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데요.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 마리아 혼자서는 도저희 감당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마리아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하심으로 마리아를 아신시키십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6절)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우리는 위로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부르시고 6가지의 약속을 주십니다. 1)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31절) 2) 예수가 큰 자(32절)-로마 제국 치하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민족과 또한 같은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소식-가 된다. 3)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다.(32절) 4)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다.(33절) 5)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3절) 6) 나실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다.(35절) 할수 없다고 절망하고, 빼앗기고, 억눌려 절망가운데 있던 이들에게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로, 구속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를 통해 절망속의 인생들을 위로하시려는 계획에 마리아를 부르셨고, 마리아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여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맺음말
하나님은 메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는 둥치에서도 새로운 싹을 내시고, 뿌리에서 무성한 가지가 돋아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백성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주시는 소망을 현실로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새의 뿌리”를 통해 우리에게 소망이 찾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에는 여전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그 사랑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에수님은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열방의 소망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든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모든 끝“(이사야 45:22)까지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고 열방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이 주는 절망에 휩쓸리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믿음으로 소망의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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