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서 2:1-10
지난 주에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로써 이제는 교회가 더 이상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 건물 중심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이요 살아 있는 성전의 반석이신 그분을 따라 함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 권속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시간 산 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해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고 주님의 교회에 들어오면 우리들의 성품이 근본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아니 변해야 합니다. 1-3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에 대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1절에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 2절에서는 우리가 취해야 할 것, 그리고 3절에서는 우리의 삶의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모든 악독(미워하는/악의적인)과 기만(속이는 것)과 위선(겉으로만 착한 척 하는 것)과 시기(시기/질투)와 온갖 비방(헐뜯고 비난하는)하는 말들을 버리라고 합니다. 사랑이나 새로운 삶의 방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게 버릴 수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거듭난 결과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1:23)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삶의 태도라고 간주된 생활방식을 버린다는 것은 저자는 초대교회 그리고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책임감이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반면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도 있습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젖을 먹고 자라나는 갓난 아이에 비유합니다. 젖은 선포된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말씀으로 가득찬 음식이 그리스도인들을 자라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게 합당한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할 뿐만 ᅟᅡᆼ니라 그렇게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젖’으로 표현된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배고픈 젖먹이처럼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자라기 위해 엄마의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동경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고 거듭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하고 신령한(혼합되지 않는 순수하고 이치에 합당한) 말씀(그리스도)을 갈망하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짓되고, 속이는 비방하고 시기하는 세상적인 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의 영적인 성장의 밑거름으로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도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자란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심과 순수한 가치를 말합니다. 그 가치를 경험한 성도로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세상적인 가치들을 버리고 말씀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 돌과 산 돌 공동체
돌은 보통 죽은 자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반면 ‘산 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려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버린 바라’(ἀποδεδοκιμασμένον/아포데도키마스메논)는 말은 ‘배척하다, 버리다, 거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신 사건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는 그분(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께 선택받으신 분이십니다. 가치없는 존재가 아닌 보석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4절) 그리스도는 ‘산 돌’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살게 하시며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 산돌과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신령한 집’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5절) 여기서 신령하다는 말은 ‘성령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토대로 한 건물에 접함되어야 하고 이 건물에서 사제(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기도, 찬양, 감사, 회개의 제물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모퉁잇 돌의 이중적 의미
“모퉁잇 돌”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현관 위나 둥근 지붕에 있는 건물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돌을 뜻하기도 하지만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지침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돌은 두 가지의 영향력을 미친다고 본문은 이야기 합니다. 모퉁잇돌은 믿는 이들에게는 ‘보배’(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이사야 8:14-15에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이에 따르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치를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자신에게 걸려 넘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지 않고, “산 돌”이 되어 “하나님의 집”에 접합되지 않은 자는 걸려 넘어지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돌이 될 수도, 파멸의 돌이 될 수도 있다는 선언입니다. 오로지 그것은 말씀에 대해 순종하느냐 불순종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산돌 공동체가 해야할 일
이전의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고, 그분의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절)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족속이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된 삶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봉사자(제사장/거룩한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