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7-22(참조: 삼무엘하 7:1-17, 요한계시록 19:11-16)
들어가는 말: 환호 뒤에 가려진 비극의 서막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문 앞은 "호산나"를 외치는 인파와 종려나무 가지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승리의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왕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자기 몸보다 무거운 나무틀을 짊어진 채 '해골'이라 불리는 언덕으로 끌려가고 계십니다. 이 찬란한 봄날, 우리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봄을 기억합니다. 바로 제주 4·3입니다. 아름다운 섬 제주의 유채꽃과 동백꽃이 붉게 물들었던 그해 봄,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명패'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4·3의 희생자들을 잇는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군중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왕을 환호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영원히 견고할 나라"의 영광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왕은 가시관을 쓰고 자기 십자가를 진 채 해골 언덕으로 향하십니다. 이 비극적 역설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 제주 4·3과 닮아 있습니다. 해방의 기쁨(종려주일)도 잠시, 이념의 갈등 속에 제주는 거대한 골고다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의 명패를 통해, 하나님이 기록하신 진실이 어떻게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는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십자가 위에 붙은 '이름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머리 위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히브리, 로마, 헬라 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반발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요구합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22절) 빌라도는 정치적 계산으로 이 문구를 썼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빌려 온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이 청년이 바로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제주 4·3의 희생자들도 해방된 조국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는 국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국가의 보호가 아닌 총칼이었습니다. 다윗의 언약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던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였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하고 계셨습니다.
지워졌던 이름들, 제주 4·3
제주 4·3의 역사 또한 빌라도 앞의 대제사장들처럼 진실을 지우려는 세력들에 의해 오랫동안 왜곡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은 '폭도'나 '빨갱이'라는 가짜 명패를 강요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조차 죄가 되던 세월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는 삼국 언어(히브리, 로마, 헬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이 진실이 온 세상을 향한 것임을 뜻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 진실을 왜곡하려 했습니다. 제주 4·3의 진실도 수십 년간 '폭동'이라는 가짜 명패 아래 봉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입을 통해 선포된 "내가 쓸 것을 썼다"는 선언은 인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역사의 기록자이심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이루어진 왕의 등극식이었습니다. 제주의 무명천 할머니, 북촌리의 눈물... 세상은 그들을 잊으라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역사의 정중앙(가운데)에 이미 기록해 두셨습니다. 십자가 위의 명패가 변하지 않았듯, 역사의 진실 또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는 선언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들립니다. "이들은 폭도가 아니라 무고한 희생자였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평화의 씨앗이다." 이제야 비로소 제주의 비석들은 '백비(글이 없는 비석)'를 벗어나 자기 이름을 되찾고 있습니다.
고난의 연대: 중심에 계신 예수
본문 18절은 예수께서 두 사람과 함께 못 박히셨는데, "예수는 가운데 계시더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참하고 억울한 자들의 한복판에 계셨습니다. 종려주일에 우리가 묵상해야 할 주님은 화려한 왕궁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골고다의 비명 속에, 그리고 제주 중산간 마을의 통곡 소리 속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곁에서 그들의 명패를 직접 써주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내 자녀요, 평화의 일꾼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끝이 아니듯, 4·3의 비극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계 19:11) 주님께서 억울한 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시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제주의 동백꽃이 붉은 이유는 그 피의 호소를 주님이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성도 여러분, 빌라도가 쓴 명패는 조롱의 의미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구원의 이정표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도 이제 세상이 낙인찍은 혐오와 분열의 명패를 떼어내고, 주님이 쓰신 '사랑'과 '화해'의 명패를 달아야 합니다. 제주 4·3의 아픔을 보듬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짊어지신 그 십자가를 본받아, 우리 사회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는 화목제물이 되는 길입니다.
나가는 말 : 화해와 평화의 명패를 들고
이제 시선을 미래로 돌려 요한계시록 19장을 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던 그분이 이제 백마를 타고 나타나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며, 그 옷과 넓적다리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명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명패는 빌라도가 쓴 종이 명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승리의 선언입니다. 이번 고난주간 동안,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예수님의 명패를 묵상합시다. 세상이 무엇이라 비난하든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너는 내 것이라"고 이미 써 놓으셨습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평화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고난주간을 시작하며 우리 가슴 속에 ‘화해의 명패’를 새깁시다. 억울한 자들의 눈물을 기억합시다. 제주 4·3의 아픔을 우리 민족의 십자가로 품읍시다. 골고다 언덕에서 진실을 선포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이 땅의 어두운 곳에 평화의 글씨를 써 내려갑시다. 종려주일에 주님을 환영했던 그 마음이, 이제는 고통당하는 이웃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오듯, 제주의 눈물 뒤에 참된 평화의 봄이 활짝 피어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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