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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마음에 하나님의 지혜를 담으라

꿈지기의사랑 2021. 11. 14. 01:30

누가복음 6:39-45

 

들어가는 말

 

   오늘은 창조절열한번째주일입니다. 창조절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주는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됩니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벤치마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특정 분야에서 우수한 상대를 기준, 목표로 삼아 자기 기업과의 성과 차이를 비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의 뛰어난 운영 프로세스를 배우면서 부단히 자기혁신을 추구하는 경영기법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본따르기'입니다. 기업에서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타사에서 배워오는 혁신 기법이 벤치마킹입니다. 그러나 복제나 모방과는 다른 개념인데,  벤치마킹은 단순히 경쟁 기업이나 선도 기업의 제품을 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장·단점을 분석해 자사의 제품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해 시장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개념입니다. 독일의 초대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서만 배우지만,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운다." 벤치마킹은 원래 토목 분야에서 강물 등의 높낮이를 측정하기 위해 기준점인 벤치마크(benchmark)를 표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서 벤치마크란 측정의 기준점을 말합니다. 기업 경영 분야에서 벤치마킹 기법은 미국의 사무기기 전문 기업 제록스가 일본의 경쟁 기업들의 경영 노하우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일본에 건너가 조사 활동을 벌이고 그 결과를 경영 전략에 활용하여 다시 기업 경쟁력을 회복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두번에 걸쳐서 이웃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도 바로 그 이웃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평지설교

 

  누가복음 6장 말씀은 예수님의 평지설교(눅 6:17-49)의 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장소적으로보면 마태복음에서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였듯이, 마태는 모세보다 더 큰이가 산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또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고, 반면 누가는 평지라는 장소를 통하여 누가가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를 반영함으로써, 가난하고, 힘없고, 병이 들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도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누가의 신학적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장소로 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자신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환경이나 상황, 그리고 성격들로 인해 이와같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청자가 유대인이고 누가복음의 청자가 그리스-로마 문화권 사람들이라는 차이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산을 신성시하고, 그리스-로마 문화는 아고라 같은 광장 문화가 발달해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서 같은 소재를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 : 왜곡된 시선과 자기 정당화

 

   오늘의 말씀에서는 올바른 선생의 중요성, 비판적 사고의 위험성, 신앙의 리트머스 테스트인 삶의 열매 등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가장 온전한 선생이시며 그분이 모든 종교적 지도자들이 닮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비판에 관하여는 모든 비판을 경고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판의 일반적 경향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특히 이중잣대를 가지고 비판에 임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모습을 경고하며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에게는 몹시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는 못견뎌 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비판은 하지만 건설적인 비판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려는 비판이요, 대안이 없이 비판만을 늘어놓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다른사람의 허물만 보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와 비판의식이 올라와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이 보여 지는 것을 보면서 '투사작용'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조금 쉽게 말하면 내안에 있는 못된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못견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더 쉽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1절) 다른 사람의 잘못은 나의 눈에 보이지만 나의 잘못은 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합리화 시킵니다. "괜찮아 나는 잘 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못하니, 저 사람은 왜 저러지!" 남탓에 익숙해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더 큰 허물이 있음에도 내가 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합리화 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 못만을 지적하는 경우가 우리 안에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내로남불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유대의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선생으로서 그들은 사람들의 잘못을 집어내고 꾸짖고 비난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모습을 가졌지만 그들의 실제적인 삶에서는 외형적 정열에만 신경을 쓰고 형제 사랑의 정신을 망각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작은 실수에도 지적하고 비난했습니다.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는 무오한 자라고 자만하며 비교하며 자신들의 삶에 있는 잘못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형제의 허물을 덮어줄 만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비판은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랑없이 비판만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39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추종하거나, 교회를 세습하거나,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불통하는 모습으로 지탄받는 교회가 어찌 세상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혀(말) : 비판하는 삶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을 잘하면 천 냥이나 되는 큰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말로, 말만 잘하면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대화가 필수입니다. 조리있는 대화 능력은 많은 이점을 가져오는데요. 예화) 서희의 담판 - 993년(성종 12년) 거란의 소손녕 장군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송과는 교류하면서 자신들과는 교류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서희는 압록강 근처에 주둔한 여진족으로 인해서 외교가 불가하니 압록강 일대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서로 외교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말합니다. 이 말로 인해 거란족은 물러가고 압록강 일대의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런데 비난하는 말은 어디로부터 시작될까요? 그것은 지혜없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자신 안에 있는 허물을 발견하고 변화시키는 초석으로 삼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41-42절)

   바울은 누군가에서 선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세상이 지혜를 따라 살아가기에 우리의 삶이 비판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4-16) 말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시기하고 다투고 자랑하고 거짓말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편견과 거짓이 가득한 우리의 혀(말)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귀신의 지혜, 세상의 지혜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시가 달린 말은 결국 화평이 아닌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담은 교회

 

   편견의 눈이 아니라 사랑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서 형제의 아픔을 발견하고,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충고하고, 권면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인의 삶을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삶의 열매를 들어 가르치고 계십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듯 선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통하여 우리 모두의 삶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땅에 무엇인가를 심으면 그것이 자라기 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를 보고 평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있다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선을 쌓으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되고 우리의 마음에 악을 쌓으면 악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중에서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 두드러 집니다. 지금 내가 사람들을 향해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랑의 언어입니까? 아니면 가시가 달린 비판의 언어입니까? 먼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주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우십시오. 사랑의 언어가 말씀에 기초한 언어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잠언도 이렇게 말합니다. "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잠언 3:21-23)

 

나가는 말

 

   상대방에게 의미 없이 던진 말과 행동, 그리고 상대방 눈 속에 있는 티를 악착같이 보려고 하는 모습 등을 반성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상대방에게 남겨놓은 흔적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에 기초한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채워질 때 우리는 세상이 벤치마킹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비난으로 인한 시기와 다틈과 분쟁의 장이 아니라 화평과 관용과 긍휼이 가득한 곳이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복음 6: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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