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2-9
‘베데스다’는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 이라는 뜻입니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베데스다 못의 크기는 길이 100-110m, 넓이 62-80m, 깊이는 7-8m 정도였습니다. 이 못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라 빗물을 모아 놓은 것이며 성전에 물을 공급하고 종교적, 의학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그 베데스다라는 곳에서 일어났던 환자 치유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지 함께 나누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비가 없는 자비의 집
어찌 되었건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장소라면 이름답게 그곳에서는 자비의 역사가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은 무엇입니까? 베데스다 못이 있는 곳에는 양문이 옆에 있었습니다. 양문(베냐민의 문)은 성전에 제사를 들릴 때 드릴 양을 사고 파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는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는 곳입니다. 천사가 가끔 이곳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 걸렸든지 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집에 어울릴 만한 현상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각에 모여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이 빠져라 물이 동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중에 한 사람이 끼어 있었는데 그는 장장 38년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절)
이 사람은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38년 이라는 세월은 이 베데스라라는 못의 상황을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자-긍휼에서 배재된 사람
자비의 집이란 이름은 허울뿐입니다. 자비란 어떤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합니까? 그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이들이 설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데스다는 어떤 곳입니까? 경쟁만이 남아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정신보다는 경쟁으로 이겨야 하는 사회입니다. 일등만이 우대받는 곳입니다. 어떤 개그맨이 말한 것처럼 일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4절)
이 뒷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먼저 들어갈 수 있을까요? 말하나 마나 조금이라도 덜 아픈 사람입니다. 병에 경중은 있을 수 없겠죠. 자기의 병이 가장 커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더 아픈 사람, 조금더 급박한 사람이 먼저가 되는 곳이어야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장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세상의 방식, 힘있느 자, 능력있는 자, 재빠른 자가 우선권을 차지하고 나을 수 있는 곳이 되어버린 자비는 사라진체, 경쟁적인 구도만이 남아 있는 안타까운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서 달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 현실에 38년을 허비한 병자가 우리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긍휼히 여김받을 권리를 박탈 당했습니다. 일등 아닌 나머지는 그들의 능력과 노력의 여하와 관계없이 사람들의 기억밖으로 밀려난 세상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38년을 노출 되었던 병자는 우연히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이와 같은 질문을 하시는 예수님은 그의 모든 사정을 잘 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답변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 합니다. 세상을 원망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긍휼을 베푸시고 참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38년 된 병자는 줄도없고 백도 없습니다. 일어설 수 있는 길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를 도와서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줄 사람도 없다는 것으로 보아 인간 관계도 깨어진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38년 동안 실패해 온 삶을 바라보며, 절망과 낙심과 아픔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도와 주고, 그에게 소망을 주신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그분의 사랑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시고, 긍휼의 마음으로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의 늪, 슬픔의 늪, 아픔의 늪으로부터 그를 건져 주시고 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아무도 기억해주는 이 없었던 38년 된 병자를 기억해주고 희망과 소망을 잃었던 그의 인생에 긍휼의 마음 가득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육체적인 병까지 치유하시는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데스다는 참 치유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치유란 긍휼의 마음이 동반된 사랑 나눔이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베데스다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조차도 일등만을 기억하는 병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용산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닮아, 베데스다가 참 치유와 참 사랑이 넘치는 장소가 된 것처럼 우리의 교회공동체도 이런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9절)
예수님을 만나는 교회, 예수님의 역사가 있고, 예수님의 긍휼이 가득한 곳으로서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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