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2:2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옥토로 일구어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죄의 현장에서 돌아서도록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죄의 현장에서 돌아서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반대편 방향인 다시스로 갑니다. 당시 니느웨는 세계 최대강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였고, 니느웨 사람들은 잔인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수의 살갗을 벗겨 성명을 도배할 정도로 잔혹한 사람들었습니다. 이 성에 심판을 선포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등지고 반대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탄배에 폭풍을 겪게 하십니다. 그는 결국 폭풍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그 고난속에서 요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요나서 2:2)
고난을 통해서 요나는 자신의 삶의 전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고난이 아니었다면 그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심판역시 면치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덮친 것은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이면서 동시에 은총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의 결과로 고난을 겪는다면 그것은 은총입니다. 오히려 죄를 지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방치하신다면 그는 더 무서운 심판아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의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숙을 이루도록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모든 것이 다 완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러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더 큰 믿음으로, 더 큰 성숙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는 아브라함의 이민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오늘날로 하자면 외국 이민을 간것입니다. 낯설고 말선 바로 그 현장으로 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누리던 모든 기반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큰 믿음으로 한 것을 더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어린 외아들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검사 끝에 암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어떤 손도 쓸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실컷 울기 위해 예배실을 찾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고난 속에서 이사야 41:10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는 자식의 불치의 병이라는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 한가운데서 자신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고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우리를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시 119:71-72)
고난이야말로 참으로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가치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천천 금은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타인을 위해 사는 존재로
참 인간의 가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틴 부버는 <너와 나>라는 책에서 타인은 또다른 나라고 고백합니다. 즉 타인을 향한 사랑을 정작 나를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좁은 나가 아니라 더 큰 나로서 성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화) 서울 봉천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윤주홍 장로님은 ‘봉천동의 슈바이처’로 불립니다. 그곳의 주민이라면 그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사랑하는 자식을 교통 사고로 잃은 후부터라고 합니다. 아이를 친 택시기사가 피투성이의 아이를 안고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달려갔더니 윤장로님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식에게 사망 진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수많은 고통의 나날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신의 자식을 데려가신 것은 자신을 슬픔 속에 내버려 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달았습니다.”
윤장로님은 자식 하나를 잃었지만 수많은 자녀를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지금은 만인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난은 바위와 같은 우리를 부서뜨립니다. 작은 자갈로 흙으로, 깨어지고, 부서지고, 갈아 뒤집어 엎어짐으로 우리를 옥토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심으로, 수많은 영혼, 생명들을 용서하시고 살리신 것처럼, 주의 몸된 교회가, 주님의 자녀인 내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를 질 때 내 가정이, 교회가, 지역이, 민족이 살아날 것입니다.
십자가란 피하면 피할 수록 무거운 짐이 되지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짊어질 때, 주님께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부활의 영광으로 승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에서 발췌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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