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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꿈지기의사랑 2007. 3. 31. 22:38

요한복음 19:17-22

 

   영화나 드라마를 보게 되면 어떤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 앞에 그 장면에 대한 숨기진 상황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장면을 통해서 그 담음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고, 그 장면에 대해서 더욱 극대화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것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을 받은 이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임으로써 그분에 대한 믿음을 키워가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다시한번 깨닫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골고다 언덕

 

   예수님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호하며 환영하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로마의 재판관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즉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요. 왕이라고 소리쳤던 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로고, 그를 죽여야 된다고 소리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장면 이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형벌인 십자가 형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달리실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언덕이라 불리우는 골고다를 향해서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는데, 두드러진 언덕이었으며, 큰 길가에 있어서 행인들이 익히 보며 지나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지형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으실 장소로서 적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천하에 공포되어야 할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높은 데서 전파되어야 하겠고, 큰 길 가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은밀히 감추일 것이 아니었고 얼마든지 드러내어 선포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가운데 함께 하시고, 가장 흉악한 죄악을 담당하시는 분으로서 십자가의 정 중앙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8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의 한 가운데까지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심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골고다의 언덕, 죽음의 언덕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의 보혈을 통해서 죽음의 장소가 생명의 장소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해골의 언덕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두 가지 뜻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그의 죽으심이 높이 들리시어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하고, 둘째는, 그의 죽으심이 우리를 대신하신 저주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말한대로 나무에 달려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신21:23). 그가 우리를 대신하셔서 저주를 받으신고로 우리는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가 골고다 즉 죽음의 언덕에 오르심으로 우리는 생명의 약속을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누구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은 누구인가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그렇습니다. 그가 로마의 형법에 따라 죽었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형벌인 십자가 형은 아무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죄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진홍같이 붉은 죄, 주홍같은 우리의 죄가 양털같이 희어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가장 중한 죄를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분에 대해서 요한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로마의 법에 반하여 중한 죄를 지은 자, 그 중에서도 그들을 반해서 반역을 꾀한자를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명패에 무엇이라고 썼다고 말합니까? "유대인의 왕"이라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반역자입니다. 당시의 유대의 통치자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그들의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그 로마의 황제를 저항한 세력의 두목으로 예수님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는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한 왕이라면,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심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 말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왕을 자신들 스스로 죽인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이 반역행위를 한 것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참 왕이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참 왕이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참 왕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해야 하는 우리들을 위한 거룩한 희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는 종노릇 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요.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라도의 할 일

 

   본문에서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의 죄수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하는 우리의 맡은 바 사명이 있습니다. 빌라도에게는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씀으로써,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으로, 인류를 구원할 자로 오셨음을 선포하도록 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사명은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이끌어 내시고, 영원한 자유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는데, 그 하나님의 아들을 밝히 알도록 하는데,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음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빌라도의 사명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사명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가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신 것을 선포하고, 만방에 알리는 사명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바로 그분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명자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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