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8:1-9
오늘은 참으로 뜻 깊은 날입니다. 용산교회가 믿음의 선조들에 의해서 탄생된지 99주년을 맞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과 주님에 대한 헌신의 마음으로 이 교회가 세워진 날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의 믿음을 잘 이어받고 그것을 더욱 발전 시켜서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교회로서 더욱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법고창신(法故創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할 줄 알고 새것을 창안해 낼 수 있는 능력`으로 연암의 `초정집서`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 말과 유사한 말은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입니다.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 옛 것을 익혀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지식과 도리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용산교회의 신앙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용산교회를 세울 때의 정신과 성서의 정신을 다시 새기며, 신앙인이로서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교회사를 토대로
교회의 90년 사를 토대로 우리 교회의 몇 가지 특징을 찾아 낸다면 먼저는 복음에 대한 순수함과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초창기 교회가 설립될 당시 선교사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선조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사모하는 마음 가운데서 용산에 복음의 씨앗이 되었던 모습을 통해서 용산교회의 신앙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삶이 변하고, 예수를 만나고 인생의 새로운 맛을 알아서 그것을 누리고 나누며 살기 위해서 이곳에 용산 교회를 설립한 그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믿음의 선조들의 참 신앙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었습니다. 일제말기인 1937년 무렵에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신앙을 뿌리채 흔들려는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그에 맞서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수호하려는 참된 신앙의 열정으로 모진 고초와 고통을 감내하며 신앙을 지켜오신 신앙의 전통이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헌신적인 봉사와 전도(구령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뿐 아니라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야학 등의 지역민을 사랑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앞장 섰던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를 방불케하는 영적인 열성을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크게 용산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전통입니다.
말씀 속으로
본문에는 바벨론 포로기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들의 참된 신앙의 모습을 떠나서 하나님을 멀리하던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선지자에게 그들의 죄상을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던 처음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듣기를 좋아합니다. 죄와 허물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비록 저주일지라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의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외식적인 모습, 즉 형식적이고, 불성실한 태도의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이스라엘을 향하는 하나님의 책망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 의로운 판단을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즐겨하고 금시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자 그들은 불평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로 왜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여 주시지 않느냐는 항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들은 참 금식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며 금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금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냥 금식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 주실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재를 뿌리고 다른 사람들이 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도록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형적인 것에는 관심을 가졌으나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용산교회가 시작할 무렵의 선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지 않았던 바로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형적인 드러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산교회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금식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모습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는 세상적인 것을 즐기고 추구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3절) 이 이 말씀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마음을 굅게 하였다는 것이 외형적으로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마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오히려 금식을 즐기는 가증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식의 본래적 목적과 의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현실상의 축복을 비는 수단으로, 단지 종교적 자랑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사실을 계속 책망하십니다. 본래 금식은 회개와 성결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느 9:1,2;시 69:10),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뜻과 정욕을 억누르고 자기를 부인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 여기 '일'에 해당하는 말인 '에체브'는 매우 힘들고 고통이 따르는 노동, 땀, 산고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며 또한 '시키는도다'에 해당하는 '나가스'는 '폭정을 가하다', '강제 징수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금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챙기기 위해 그 종이나 일꾼에게 가혹한 일을 강요하는 악덕 주인을 고발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느 5:1-5).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부정하는 금식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는 행위는 가증한 외식 행위입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금식은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에 있지 않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신의 욕망을 바라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한 종교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여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야고보서 4:3)
그러나 용산교회의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그분들이 인간적인 욕심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 복음을 통해서 인생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에서 기도하고 간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인간의 더러운 요소를 제어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하면서도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쳤습니다. 그들의 육적인 모습은 금식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증오와 미움이 있으면)면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뒤집어 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악인의 재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잠언 21:27)
진정한 금식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모습은 바로 우리의 실천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입술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께서 용산교회를 세우시면서 보여주신 신앙의 전통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고역으로 그들을 시달리게 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보았을 때 말로만 그들이 행복해 지라고 곧 괜찮아 질것이라고 위로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들을 향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종교적인 행위를 멋들어지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모습 가운데 이웃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금식도 신앙의 모습도 아닙니다. 사랑의 실천을 근간으로 하는 금식을 행하면 빛이 아침같이 비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번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일에 형통과 번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셔서 그 길을 인도하시며 형통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며, 하나님의 보호와 동행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헌신적인 봉사와 전도와 야학 등을 통한 초기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으로 인해서 용산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처럼 앞으로의 용산 교회 역시 지역사회의 본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과거에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모습가운데 오늘도 함께 하시며 기도할 때마다 여기있다 말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은혜를 누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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