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11-19
지난 주에는 버림으로 우리의 인생의 변화는 시작된다고 했고, 버림의 사랑을 배워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버린 그곳에 믿음이라고 하는 마음을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배우기를 원합니다.
나병환자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곳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사이 어느 마을이라고 나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왕인 살만에셀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앗수르 민족의 이주정책이 펼쳐졌는데, 그 때에 혼혈이 형성된 지역입니다. 또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때 다시 한 번 이주 정책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서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동떨어진, 구원과 관계없는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되고, 그들과 서로 왕래가 사라지고 함께 만나는 것을 꺼리기까지 한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고, 고난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분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사이 어느 마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 앞에 10명의 나병환자(한센병)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잘 살펴 보십시오. '멀리 서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야 할 텐데 그들의 처지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들은 멀리 서서 있었습니다. 레위기 13장에는 그들이 해야할 행동에 대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레위기 13:45-46)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근처에 올라치면 '부정하다' 소리를 내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외치지 못하고 입술을 가려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자신의 인생이 비참했겠습니까? 병이 있는 날동안은 그가 혼자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과 마을의 국경지대에서 살았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진밖에서 즉 사람들과 분리되어서 살아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이니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모습이었겠습니까? 또한 인간은 사랑을 받고 주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필립얀시라는 영성가(작가)는 이 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잔인한 병이어서 치유하지 않으면 손과 발 그리고 얼굴이 뒤틀려서
아주 흉하게 된다. 나는 세상에서 나병 환자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인생도 때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난을 통해서 외로움과 절망과 낙망 속에서 홀로 살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만나다
이들은 운좋게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구제를 요청한 것인지, 아니면 병고침의 이적을 요청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함 없이 그들이 요청하는 것의 진의를 파악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
예수를 만남으로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함께 해주시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그들은 외로운 인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 말을 들으면 어쩌면 환호성을 올렸을지 모릅니다. 제사장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이라는 말은 그들의 환부가 나았는지를 확인하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곳에서 합격판정을 받으면 그들은 더 이상 방랑의 삶, 외로움의 삶, 좌절과 실패의 삶, 격리된 삶을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상처입고, 병든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가족으로부터 격리되고 사랑으로부터 외면당한 인생을 살아왔던 그들에게 이것은 큰 은혜요, 복음의 소리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에 계신분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와 같은 육체의 몸을 입고 함께 아픔과 고통을 나누시고, 우리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시며 치유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보니 깨끗함을 얻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하나가 나은 것을 보고'(14-15절)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사실, 참된 제사장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사실을 바르게 깨닫는 자들은 적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단 한 사람만이 나은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모습의 변화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단지 선생으로만 아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구주로 아십니까? 주님을 진정한 구주로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질병이 치유된 것을 경험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사례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두가지 일이 우리에게 가려쳐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참된 치유의 역사의 근원이 누구로서부터 오는 지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리는 삶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질문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질문들은 점점 그 폭을 좁혀 오더니 결국에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러 돌아온 것에 귀결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감사하는 삶으로 귀결됨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마음의 결여를 말씀합니다. 믿음은 감사와 연결될 때 완전해 집니다.
그러한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다른 아홉 사람은 육체적인 치유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치유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믿음으로 그의 육신적인 질병으로부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통해서 죄의 사함과 구원의 은혜까지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의 삶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감사하는 믿음으로 전인격적인 구원의 기쁨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