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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풀리게 하시는 하나님

꿈지기의사랑 2024. 8. 11. 10:04

마가복음 7:31-37(참고 이사야 42:18-43:7, 로마서 10:5-17)

 

들어가는 말

 

   며칠 전 컴퓨터를 하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되지않는 증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컴퓨터로 했던 모든 일들이 중단 되었습니다. 저희집 티비는 인터넷을 통해서 보게 되어 있는데 티비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뇌에 정지가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많이 의존을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느껴졌습니다. 겨유 하루 정도의 시간을 인터넷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너무나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편리함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지만 그 편리함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터넷이 되니 몸으로부터 마음까지 편안해 지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서 너무 그 편리함에 익숙해 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사님의 손을 통해서 고장났던 인터넷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원인은 집으로 들어오는 선 중간이 단선되어서 였다네요. 인터넷선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보이지 않는 작은 결함으로인해 갈라지게 될 때 우리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광복절 7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1945.8.15 해방된 것을 기리는 날인 동시에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시대를 마감하고 19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H.Carr)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광복이란 과거에 있어던 어떤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닌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특히 광복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즉 빛을 잃어버림으로써 사라졌던 희망이 빛을 회복함으로 얻어지게 되었다는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 데가볼리

 

   오늘 이야기의 배경되는 지역들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여행과 치유 사역이 국내외 할 것 없이 온 지역에서 계속됩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북쪽 경계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예수님시대에는 수로보니게라고 불렸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전 건축에 쓰일 백향목이나 잣나무, 놋 등의 자재를 많이 지원한 곳이기도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가나안 토속종교를 이스라엘에게 소개함으로써 우상숭배와 향락의 도시로 대표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두로는 시돈에서 남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대 지중해의 주요 무역항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시돈은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약 48km떨어진 항구도시로 어업과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베니게 지방으로 불리기도 합니다.(왕상 5:6) 데가볼리는 한 지역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가에 인접한 10개 도시-거라사, 가다라, 다메섹, 빌라델비아, 스구도볼리쓰, 힙보스, 벨라, 라바나, 디오스, 가다나-를 가리킵니다.

 

소통의 부재 ; 하나님과의 소통은?

 

   본문 말씀은 치유 사건이 나옵니다. 못 듣는 자의 귀가 열리고 맺힌 혀가 풀리는 치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질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귀와 입에 관련된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말을 듣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함으로 서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기관입니다. 개인이건 나라건 상호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대화입니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입장을 듣게 되고 그럼으로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병자들은 어떻습니까? 귀먹고 말 더듬는 자들입니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사람들입니다. 철저한 외로움과 단절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대화하지 않으려는 닫히 마음은 우리를 어려움 속으로 몰아붙입니다. 소통의 길이 막힌 것도 문제이지만 소통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는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42:18-20)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상대의 말이 다르게 들립니다. 상대에 대한 열린태도와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오해하고 소통의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의사소통의 걸림돌은 듣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나 원하는 것만을 중심으로 선택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에게 부정적 감정이 있거나 그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경우에도 정확한 정보수용이 어렵습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있는 상태의 일본과의 대화나, 북한과의 대화뿐 아니라 누구와의 대화도 올바른 소통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의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31) 서로 말을 더듬는 것처럼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철저하게 외면당한 이들, 소통으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을 예수님은 따로 데리고 가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따로 데리고 갔다는 것은 영접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다른 이들과 같이 철저하게 소외시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씨름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고 하늘을 우러러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시며 탄식하신 주님의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귀먹고 말 더듬던 그들의 삶이 회복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절정이 "에바다"라는 외침이셨던 것입니다. 이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자나 남자도,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고 부요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 북녘 동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사람도, 중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도 차별 없는 구원의 은총이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차별 없는 구원의 은총은 전하는 이가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1-13)

 

맺힌 것을 푸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죠? “에바다!”, 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막힌 것을 뚫고 소통하고, 교류를 통해 왔다 갔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나요?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7:35).” 귀가 열렸습니다. 잘 들리게 되었습니다. 잘 들으니, 혀도 풀렸습니다. 서로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못 듣는 사람이 듣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말 못하는 억압된 분위기를 깨뜨리고, 들을 수 없는 소외된 상황을 극복하고, 말하고 듣게 하셨다는 말씀이죠? 이것은 차별을 극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먹고 마시고 듣고 보고 하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골고루 나누는 평등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각적인 것인,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것을 배제당한 이들에게 다가가 새 세상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고’, 생명의 떡을 맛보게 하며사랑의 연대를 느끼게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다도 못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37) 또 이 사명을 이어받은 것이 교회임을 잊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의 인생도 이러한 풀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불통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지 않던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이사야 42:24) 하나님의 길을 걷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 우리의 인생에도 풀림의 은총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남북간의 종전을 향한 문제, 한일간의 독도분쟁을 비롯한 과거청산과 관계개선을 통한 화해의 장을 열어가는 것등 수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신 평화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5)

 

   보내심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사명,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화해의 장을 열어가는 화해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풀리게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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