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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변화는 교회로

꿈지기의사랑 2022. 10. 30. 06:29

마태복음 22:41-46(참고 사무엘상 16:1-13; 사도행전 2:22-36)

 

들어가는 말

 

    황금빛 곡식으로 가득하던 들판은 점점 그 황금빛 옷을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가득하던 곡식이 추수된 자리는 둥글게 뭉쳐놓은 볏단과 훵하니 빈 들판이 쓸쓸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도 저 들판처럼 변해갑니다.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 시기를 교회의 역사는 종교개혁 시대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독일 비텐베르크대학 성당 정문에 붙이던 1517년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올해는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5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올바른 신앙을 회복(신앙의 본질 회복)하자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세기에 밀라노칙령이 발표되고,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왕궁같이 화려한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정교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은 결과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유럽부동산의 4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갖게된 교회는 타락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막대한 세금을 걷고, 성직을 매매하고, 정치 권력과 야합하는 일들이 늘어갔습니다. ‘면죄부판매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교회의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과 회개에서 출발한 신앙자정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로로 선택받은 종교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까지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던 현실을 바로잡고, 개혁하여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 종교개혁의 취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은 병들었던 중세교회를 건강하게 치유하고, 회복하는 거룩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역사는 보여 줍니다. 이런 종교개혁의 의미를 말씀을 중시므로 함께 나누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의 자손 : 중심을 보느니라(sola fide/오직 믿음)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인지에 대한 대화가 오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여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중에 저 사람은 어느 집 가문이래?”라는 것과는 다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당시의 지도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을 후회하며 말씀중심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속된 것들과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이들은 율법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려서 예수님께 책망을 듣기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으까요? 그것은 그들이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는 메시야 사상이라는 것에 그 맥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삭의 자손을 통해서 그들에게 메시야가 나올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그리고 야곱의 자손중 유다의 자손에게서 그리고 그 자손인 이새의 자손중에서 나올 것이 예언되었고, 다윗에게 이어졌습니다. 다윗 시대에 그의 의로운 삶과 영화와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강력한 힘을 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분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가 회복될 것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가 그들의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막아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오실 분의 본질을 본 것이 아니라 사무엘 16장에 사울을 대신할 왕을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선택하던 그들의 기준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왕으로서의 자질은 기골이 장대하고, 수염도 나고, 남자답고 한 외형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기준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당시의 시선으로는 가장 남자답지 못한 사람이었던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삼상 16:1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 교회의 모습은 크고 웅장한 교회가 아닌 말씀위에 바로 선 교회,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거는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 되신 그리스도(Solus Christus/솔루스 크리스투스/오직 그리스도로만)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메시야) 될 수 있는 것은 혈통적인 다윗의 자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용사로서의 다윗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갈릴리 출신, 보잘 것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자, 이름없는 목수 이러한 자가 로마의 압제를 뒤엎고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주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이끌만한 강력한 힘을 가진 다윗과 같은 용사가 필요했기에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기사와 이적을 보이고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그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삶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자신들의 신분을 변화시킬 수 없는 예수는 그들의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지는 않습니까?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완벽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프지도 않아야 되고, 실패도 모르고, 부유하고, 풍요로우며, 모든 것이 해결되는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사람들처럼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우리도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아플 수도 있습니다.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자가, 아니 그보다 못한 자가 자신들의 주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몰고 갔고, 결국 죽였던 것입니다.("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율법을 믿지 않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사도행전 2:23)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을 수 없고, 실패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연약한 자가 하나님일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한 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신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사도행전 2:36)

 

메시야 예수 (sola gratia/ 오직 은혜)

 

   다윗은 그(메시야)가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리라 (110:1)

 

   진정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강력한 군사를 몰고와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구원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방식대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죄와 허물로 사망의 길에 선자들을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인도하여 낼 중보자요, 참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임을 선포하고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다윗이 자신의 주라고 고백한 바로 그분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분이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사도행전 2:30-32) 다윗이 말한 메시야 이며 자신과 동역자들이 바로 그 일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노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음부의 권세로부터 살리신 분, 사망의 권세아래 머물 수 없으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이며, 메시야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우지만 단순히 인간의 자손으로만 머물수 없는 하나님이신 참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이 아들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마서 1:3-4)

 

나가는 말

 

   세상에 변화해 간다하더라도 복음은 변질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구습메 머물러 복음의 증거의 길이 막힌다면 교회는 쇠퇴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본래의 정신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며 말씀위에 바로서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른 믿음 속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 칼빈은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 네덜란드의 신학자 요도퀴스 판 로덴슈타인이 사용했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