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4:14-28(참고 사도행전 3:22-26; 요한복음 15:18-27
들어가는 말
창조절 일곱 번째주일 예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창조절이 엊그제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7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찰나와 같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보냄에 있어서 세월을 아끼라는 성경의 말씀이 새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들판은 어느덧 황금색으로 변했구요. 어떤 곳은 이미 추수가 되어서 빈 터만이 보여지는 곳들도 있었습니다. 들판의 추수된 것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는 저렇게 추수되어지는 시기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어떤 말씀을 남기시고 싶으신가요? 오늘 여호수아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함께 누리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별의 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하는 시간들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을 이끌었던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 것을 느끽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과 각 지파의 지도자를 세겜으로 불러 모아 그들 앞에서 고별설교를 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베불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하나 상기시켰습니다. 더는 하나님과 가나안의 우상과 함께 섬기는 불의한 신앙을 하지 말고 오늘 하나님만을 선택하라고 강하게 당부하는 이야기입니다.
노예로 살던 이 약소 민족은, 하나님의 구원에 따라, 해방의 긴 여정을 마치고, 이제 약속하신 그 땅 진입로 앞에 섰습니다. 무려 40여년을 거칠고 황량한 벌판, 끝없는 광야를 걷고 걸어서, 갖은 난관과 수차례의 전투를 치뤘던, 눈물젖은 한 많은 세월을 끝내는 바로 그 시점입니다.
그들은 펼쳐진 가나안을 바라보며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습니다. 지난 역경의 순간 순간들이 떠올랐고, 흙먼지 휘날리는 그 척박한 땅에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쏟는 사람들, 감격에 겨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이들의 떨리는 기도소리와 우렁찬 찬양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습니다.
그때에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 그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언약의 맹세를 다짐하는 선언식을 거행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1절). 여호수아는 열두지파의 모든 사람들과 장로들을 비롯해 대표자들을 모이게 하고는, 하나님과의 서약식을 시작합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이기도 하지만 그 약속의 땅을 들어가는 것은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되어서 살아갈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모세를 통해서 전해졌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세 여호수아는 그들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결정해야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14-16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평화를 누리게 될 무렵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고 다른 신을 함께 섬기는 신앙인들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아도 유혹이 찾아올 텐데 하나님이 아닌 이방의 신들의 달콤함에 빠져 있는 모습이라면 그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이방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에 곧 익숙해져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대가 가고 우리의 자녀들의 세대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할 텐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될 것을 바라보는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향할 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섬긴다는 말입니다. 본문에만 무려 14번이나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아바드(עָבַד)’입니다. ‘일하다, 섬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셈어의 어근 개념) '예배하다' '순종하다' 그리고 '노예로 삼다'와 같이 강조형 어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섬긴다는 것은, 총체적이고 전적인 복종을 가리킵니다. 마치 종이나 군인처럼 말이죠, 복무하듯이 복역하듯이 충성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향해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화답했습니다.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않으리다> 그런데 이들의 섬김에 대한 결단에는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17-18절) 이들이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과 비슷한 점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고, 이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도 하나님과 이방신 사이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는 저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과 같이 자신이 떠난 후에 그의 후손들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여호수아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돌아보고 약속을 기억하자
우리는 무엇인가를 쉽게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억과 은혜의 시간들에 대해서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망각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가려할 때 우리는 무엇인가 기억될 만한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기억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한 것을 읽고 그것을 기억하고 다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기억하고도 다른 신을 섬기는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릅니다.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고 극대화하는 이방 신들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 일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신앙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선택하겠다ㅡ는 밳어에게 주변에 있는 이방신들부터 치워버리라고 합니다.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들을 제거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인줄로 믿습니다. 어느때 어떤 순간에도 그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빛에 익숙해 지기를 바랍니다. 어둠이 불편해 질 것입니다. 오히려 적당히가 싫어지고, 무슨 무슨 척하는게 싫어집니다. 왜요? 빛의 사람이기 때문이죠. 예수님 앞에 나오면 말씀앞에 서면. 말씀과 찬송이 내 속에서 요동치면 칠수록, 우리는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빛에 거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바라고 소망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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