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13-18
들어가는 말
절망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감정입니다. 무엇을 해도 자신의 현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인간은 절망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화) 어떤 분의 블로그 글에서 이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있는 상황이라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어머니께서 지으신 표정 속에서 나는 절망이라는 감정을 보았다....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치료에 응하셨던 어머니는 그 결과를 듣는 순간 삶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사라졌을 것이다.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것에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절망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미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 그것이 사라지고 난 후 찾아오는 허무함과 허탈감, 그 속에서 우리는 절망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삶에 자주 찾아오는 절망, 낙심이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다.
낙심을 넘어서는 힘 부활에 대한 믿음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견고한 신뢰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감내하기 힘든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죽음에서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은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소망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에게 찢겨 죽어가던 순교자들은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그렸던 감사의 기도입니다.
<폴리캅의 감사기도>
“오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여, 주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주께서 저를 오늘 이 시간을 위해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마시고 수많은 주의 순교자들의 반열에 들어가게 해주시고,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썩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영원토록 신실하신 주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저에게 보여주신 대로, 오늘 저를 주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 주시옵소서. 이 모든 일에 대해 주를 찬송하오며 주께 영광을 돌리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께 지금부터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지이다. 아멘.”
고린도전서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 역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 그 역시도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난의 현실을 바라보았기에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도 고린도전서에서 말했던 것과 동일 한 이야기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전했던 생명의 근간을 하나님께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린도후서 4:1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울은 그 숱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복음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바울은 영혼들의 가치와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복음 전도사의 사명을 주께 받았으므로 심각한 곤경 가운데 처하여서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 새로운 삶의 의미가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곤란과 역경 가운데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한 것은 주의 몸인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기를 원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우리도 그의 몸의 한 지체가 되었으므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의 인내는 주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목표가 되는 삶을 살도록 힘쓸 때 교회는 든든히 서고,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영원한 영광을 위해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속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겉 사람이 후패할지라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이 흐름과 함께 늙어가며 기능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늙음만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낡아져가는 우리의 외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생에 대한 소망은 어려움을 견딜수 있게 합니다. 소망이 금생에 있는 사람은 주를 위해 고난 당할 수 없으며, 옥에 갇히거나 죽음에 넘기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내생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7)
나가는 말
바울은 17~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인생의 고난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하여 낙심과 절망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 차 있으십니까? 바울은 그것은 잠시의 고통이라 말합니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진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눈에 비쳐지는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낙심이 아닌 소망가운데 살아가실 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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