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9-37
한 공익광고에서 썬글라사를 쓴 사람들이 죽 늘어 앉아서 사원을 모집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그들의 눈 시선을 위로 향하고 그 면접 대상자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장면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장애가 있어서, 학벌이, 기타 자신들이 원하는 기준을 이미 가지고 그 사람의 재능이나 능력은 아랑곳 하지 않고 뽑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벗으세요! 라는 맨트와 함께 일제히 안경을 벗은 후에야 사원을 제대로 뽑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우리의 이웃들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선 바로 율법사가 그러한 형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 이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본문에서 자기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자로, 규율로 이미 정해버린 이웃에 대해서
자랑하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율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그에 대해서 그럼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데,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의 개념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이미 구원의 대상, 자신들과 상종해야 할 대상이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은 이미 그의 이웃 개념에서 제외된 상태로 그의 이웃을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입장에서 이렇게 이웃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또 안경을 쓴채로 이웃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이란 누구일까요? 이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Caird는 "이웃됨이란 근처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다운 교제를 하는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을 하는 율법사에게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그에게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한 사람이 내려가고 있었고 그가 강도를 만났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길을 가던 여행자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강도들은 옷까지 빼앗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심한 폭행을 가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버려두고 떠나갔습니다. 즉 재물을 빼앗기고, 생명에까지 위협을 당하는 고난을 경험한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은 이러한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의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거의 예외없이 이러한 일들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침해와 노임을 떼이는 등의 일들로부터 불구가 되어도 보상한푼 못받는 일들까지 다양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 곁을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모른 척하고 슬쩍 지나갑니다. 또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이번에는 유대인 중 누군가 지나갈 것을 예상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전에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그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치료하고 싸매고, 여관으로 옮겨 그의 사람을 돌아보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인에 대해서 슈바이처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직접적인 사랑의 봉사뿐 아니라 금전적 도움을 통한 간접적 사랑도 행하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영웅적인 업적도 없고, 선을 행한 사람은 자기 사업차 떠나 버린다. 그렇다고 필요한 일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이 행해져야 할지를 결정하는 유일한 법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슈바이처의 말대로 우리의 이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누군가는 도움을 주어도 되고 누군가는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의 상태를 따라, 오늘 우리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들의 상태에 따라서 돕는 것이 바로 이웃사랑의 본래의 정신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강도 만난 사람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가 누가 되었건, 국경과 환경을 넘어서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물질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영적인 가난한자들 까지도 우리의 이웃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하여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배를 집례하는자와 예배를 돕는
자(봉사자)입니다. 그들에게도 강도 만난자를 비켜간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예배의 직무를 맡아서 하는 자들로서 시체를 가까이하거나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의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사고 속에는 사랑의 베풂보다는 그들이 종교적
의식과 직무에 대한 열정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의 올무가 되어, 그들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그 요청에 귀를 막고,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인은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그의 삶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경건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님의 사랑 정신을 행했던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질문합니다. 너는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 체계가 무너진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율법사에게 아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누가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지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의 이웃이 먼저 되라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만 간직한 사랑이
아니라 그리고 인종과 성별과 계급과 지위 고하를 떠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에 따라 우리의 이웃을
규정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올 한 해도 여산교회가 이러한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의
기준에서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들에게 우리의 몸의 봉사와 물질의 봉사를 아끼지 않고 사랑하는 한 해가 되어기지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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