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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기지개를 펴다

꿈지기의사랑 2004. 10. 27. 17:12

출애굽기 3:1-12

 

   여러분은 삶을 살아가다가 과연 내가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거지? 나의 삶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것일까? 에이 차라리 이러려면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낫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힘들때는 돈이 없을 때, 관계가 좋지 못할 때, 병이났을 때등 많이 있겠지만 아마도 살아가는 의미를 상실했을 때가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이것은 허무함을 동반하게 되는데 전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예교수였던 홀부르크의 책 <허무주의를 넘어서 생명으로>에서 "허무주의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큰 위기라고 간파하면서, 물질 만능주의, 실증주의 과학, 포르노, 문화, 생명 경시주의,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 이 모든 것들이 허무주의의 소산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허무주의는 자신의 신념이 깨지고 무너졌을 때 또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것은 반드시 진리이며 옳다 라고 믿던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될 때 그는 심한 허탈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가 이닐까? 생각합니다. 모세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가 일고, 우리 인생이 기지개를 펴듯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모세를 어디에서 부르셨습니까?(4절)-구경하러 왔다가
   오늘 모세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위치는 공간의 의미보다는 모세가 서 있는 삶의 위치, 정신적이며, 영적인 위치가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공간적인 의미로 그는 미디안의 어느 광야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양을 치는 것으로 삶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을까요? 본문 1절에는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다시 말하면 양무리를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양들을 인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애굽의 왕자로서도, 핸섬하고 능력있는 엘리트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이제 그의 나이가 80세나 된 한 노인의 모습으로 양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그는 그가 평소에 먹이던 장소가 아니라 그 지역을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우연히 한 산에 도착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양들을 먹이기 위해 의미없는 걸음을 걷다보니 도착한 곳이 바로 미디안 광야서쪽의 호렙이라고 불리는 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아니 하나님편에서 계획적(의도적으로) 그를 부르십니다. 지금까지 그의 삶은 어땠을 까요? 단조롭고, 별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던 삶이었던 것입니다. 늘치던 양을 또 쳐야하고, 가도가도 끝없는 광야길을 오가야 하는 단조로운 삶. 늘 그의 마음속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었으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절망한 인간의 표상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3절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오랫만에 그의 시선을 끄는 독특한 광경이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연약함을 상징합니다. 연약함, 즉 절망가운데 살아가고 있던 모세를 하나님은 늘 지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타지 않는 떨기 나무를 통해서 영상언어를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그것은 4절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고" 그렇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지만 그 이전에 그가 올것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절망적인 상황속 의미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한 인간을 바라보신 것("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자존감이 낮은 상태입니다.)입니다. 바로 우리의 절망적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뭐라고 말하였습니까?(11절)-움추린 자화상(낮은 자존감)
   이런 절망속에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훈련의 시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훈련의 시간은 때로 오늘 모세처럼 40년이나 걸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재능과 힘과 권력 능력을 믿고 일처리를 급하게 하다가 그만 살인자라는 오명을 쓰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동족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였을까? 그는 상단한 충격을 받고 자신 만만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아주 작고 초라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11절)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는 늘 그의 기준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다 보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기준에 가둬둔채,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상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고통가운데(7절上), 우고가운데(7절下), 애굽사람들의 학대가운데(도망자로서의 정신적인 자학가운데...)그는 움추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들의 풀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그는 오늘도 자신의 연약함, 무능력함, 꿈과 희망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움추린 자화상(낮은 자존감)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커다란 움추림이 되었습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무능함, 사랑받지 못함, 타인들과 공유할 수 없음, 비생산적임, 긴장과 불안, 하나님에게서 분리됨을 느끼게 합니다.  모세도 그랬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갈 수 있습니까?(나는 살인자입니다, 나는 도망자입니다, 그곳에 가면 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존재입니다. 그곳에 가면 난 바로에게 죽을 것이 뻔합니다. 난 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가끔 함께 일하기를 원했을 때 사람들이 저는 능력이 없어서, 나이가 들어서, 경제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등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발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들의 삶가운데 모세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시각에서 시작되거나 끝맺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모세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12절)

    -기지개 펴는 모세(회복)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그를 사용하시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40년동안 침묵하고 계시다가 이제 그의 때를 발견하시고 그를 부르고 계십니다.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사고를 깨뜨리고, 최절정의 절망가운데에 빠져 있는 모세, 움추릴대로 움추려서 더이상 움추릴 수 없는 모습을 가진 모세, 그러나 그는 이미 훈련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절망가운데서 이미 훈련에 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혼자는 안돼..."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양을 먹이며 그에게 주어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향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며, 어떻게 하면 그들이 좋은 풀을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때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그 때에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책 <나무>에서 특별히 "황혼의 반란"이라는 부분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노인들의 존재를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여서 그들을 쓰레기를 폐기하듯 죽이는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한 노인(프레드)이 이에 대해서 반발하고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노인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리를 존중해 주십시오. 우리를 사랑해 주십시오. 노인들은 아기들을 돌볼 수 있고 뜨개질을 할 수 있습니다. 다리미질이나 요리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모든 일을 우리는 아직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늙은이들을 죽음으로써 마치 쥐들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가장 약한 구성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리는 쥐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쥐가 아닙니다. 인간은 서로 연대할 줄 알고 함께 어울려 살 줄 압니다. 만일 인간이 가장 약한 자들을 죽인다면, 인간들의 모듬살이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노인을 배척하는 법률들을 철폐합시다. 우리를 제거하기 보다 활용할 생각을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능력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좌절할 수 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움추려있는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일으키십니다.

   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어쩌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려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넌 할 수 있어. 이제 일어나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잖니" 할 수 없다고 외치는 세상, 쓸모없다고 외치는 세상에 반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아이도 돌볼 수 있고, 뜨개질도, 다리미질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프레드와 그 노인들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와 내가 함께 하기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 우리와 늘 함께 하셔서 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일어나 아직도 복음에 생명의 말씀에 목말라하는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을 하자며 일으키시는 그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함께 일어나 기지개를 펴는 삶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