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정직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코람데오1)’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입니다. 또한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에도 언제나 정직한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상실한 원인 주의 하나가 있다면 코람데오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은 오늘 우리들이 반드시 회복하여야 할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욕심을 죽이면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습니다. 욕심의 죽임은 곧 죄의 죽임이 되기 때문에 코람데오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잇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대부분은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욕심은 나아가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싶어도 우리의 욕심이 막아 버리고 침묵하시고 뒤에서 바라보시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나, 성도(나)에게 있어서 가장 불행하고 치명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동식「정직한 질문 정직한 답변」도서출판토라 99-100-
최근 방송되는 프로그램들을 보아도 양심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것을 봅니다. 자동차 신호나 규정을 무시하는 수많은 사람들, 누가 보거나 보지 않거나 지키는 것이 양심있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조차 없습니다. 탈세를 일삼는 사람들, 거짓말을 일삼고, 사람들을 속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과연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삶들일까요? 그리고 과연 그런 모습 가운데 나는 서있지 않나요?
말씀속으로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인 열 사람이 없는 그곳의 모습은 바로 두 천사를 욕되게 하려는 소돔 사람들의 악한 모습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롯 역시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 속에 빠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도 감당 못했습니다. 그의 말에 대해서 사위들은 비웃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조롱과 조소거리가 될 것입니다. 롯은 자신의 가족에게 조차도 영향력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환상의 섬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 지상의 낙원과 같은 그곳이 인간의 죄2)-“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다. 또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하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교만하였으며, 내 눈앞에서 역겨운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을 없애 버렸다.”(겔 16:49-50)-로 가득할 때 하나님은 그곳을 멸망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한 다면 우리의 모습 역시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된 인간,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그 풍성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은 죄의 씨앗대로, 그들은 거두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유황과 불이 하늘로부터 쏟아졌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뿌린 씨가 그들로 하여금 대 심판을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성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25절)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심판의 행위 속에서도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비록 그의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지만, 그와 딸들은 구출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동시에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힘이 큼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시지만 그 결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롯의 가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일하십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쓸쓸히 죽어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생각하신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을 향해서 이웃을 향한 끊임없는 중보의 기도를 드린 것처럼 가깝게는 우리의 가정을 위해서, 대동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를 위해서, 익산을 위해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전세계를 향해서 우리의 중보의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선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현장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 19:29)
1) 코람데오가 사용되는 통상적인 의미는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히 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인정을 하는 말입니다.
2) 성경학자들은 그들의 죄를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성적인 물란(동성애)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교만한 마음과 더불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나그네(천사)를 보고 그들을 겁탈하려고 했던 그들의 태도속에 나타난다-을 외면하고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를 들고 있다. 미쉬나라는 유대의 문헌에 따르면 그들의 모토는 ‘내 것은 내것, 네 것은 네것’으로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풍족한 그들은 자기들만의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나 나그네를 도와주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돕거나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도록 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이진희, 유대인과 함께 읽는 창세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