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33-37
제자들의 논쟁
교회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와 많은 토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토의의 내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그 토의의 내용은 공동체(교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고 토론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형상을 본받아 살려는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로서의 아름답고 귀한 일이어야 합니다.
가버나움의 집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도 그러한 사실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노중에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런데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묵묵부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정당한 논쟁이 아니고, 오히려 부끄러운 논의 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들의 논쟁은 누가 큰 자가 될 수
있을까? 였습니다. 진리 안에서의 논의와 대화는 교회를 더욱 그리스도의 진리에 굳게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교의와 규례들도 몇
백년을 통한 교회의 회의와 토론으로 일구어진 결과들입니다. 그것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비판만을 위한 토론이거나 악의를 지닌 음모성 토론,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거나 자랑만을 일삼는 토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토의는 어떻습니까? 누가 크냐? 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몰라서 물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눅 9:47)
주님은 그들의 상황을 아시고 어리석은 논쟁하는 것을 피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논의를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논의입니까? 아니면 주님께 드러내기도 부끄러운 논의입니까?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세상의 방식 대 하나님의 방식
우리는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큰 자가 되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의 큰 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 방식의 큰 자가 될 것인지를 잘
결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메슬로우도 이런 인간의 욕구를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말합니다. 물질과 환경과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풍성한 관심과 사랑을 다소유한 인간은 겉으로 자신의 이름과 뜻을 만방에 알리고 높이려는 욕구를 실현시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영광과
영예를 얻는 일은 인생의 보편적 소망이며 인생들은 그와 같은 인물이 되기를 누구나 원합니다. 최근 벌어지는 황우석교수와 노성일교수 간의 논쟁도
이에 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자신의 논리와 주장만을 내세우고 진실은 어디로 온데간데 없는 논쟁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자로 굴림하기 위한 논쟁에 불과하다는 것을 뉴스를 보면서 느낍니다. 제자들의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왔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높은 지위에 앉을 수 있을까를 논쟁하는 어리석음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서의 큰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의 큰 자는 높은
자, 권력이 많고, 힘이 센 자가 큰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큰 자는 그들의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꼴찌가 되는 것이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자가 섬김을 받고 봉사받으려는 사람보다 성숙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섬기고 봉사하는 자가 섬김 받으려 하는
자보다 크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크고자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반대 방향을 이야기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6)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내가 높아지려는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었을 때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라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우리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메시야가 아니라 섬김의 표본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예수를 대하듯이
어떻게 하면 이런 섬김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후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먼저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 아이는 인정받지 못하고 증인이 되지도 못했고 사람의 수에도 포함도지 않던 가치 없는 자처럼 낮은 자의 모습으로
있었던 부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을 영접하는 것처럼 섬겨야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차별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안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 형상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섬기는 자의 자세로 어린 아이들(낮고 천한 자들, 소외자들)을
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용납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차별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들의 입장과
처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서 그들안에 계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대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외형과 외모를 보지 말고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그의 필요를 따라서 도울 줄 아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큰 자는 자신이 크다고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겸손히 낮추며, 섬김의 삶을 사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태복음 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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