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27-37(참고 잠언 16:1-9; 고린도전서 9:19-27)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절의 마지막주입니다. 무더웠던 날들이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감기에 들기 좋은 날씨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건강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람에게는 영과 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영은 바(Ba)라고 불리며, 개별적인 인격을 나타내는데 이는 사람의 외형을 결정합니다. 혼에 해당하는 카(Ka)는 생명력을 상징하는데, 혼의 본질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크눔신이 도예판에서 아이의 몸을 만들어 그들의 어머니 몸속에 넣어준다고 믿었습니다. 생명과 다신의 여신 해켓과 출산의 여신 메스케넷이 카(혼)를 만들어 내고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 그들의 영에 해당하는 카를 불어넣어 숨을 쉴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감정과 사고, 그리고 의지와 마음가짐을 좌우하는 것은 뇌가 아니라 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심장을 Ib(이브)라고 하는데, 심장을 이집트인의 영혼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심장의 무게가 가벼운(죄가없는) 자는 신들과 함께 살며 부활의 때에 같이 부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심장은 관밖으로 내보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시간 마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 마음의 문제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들이 만나는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는 두 가지 큰 주제입니다. 네가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을 취하는 것 말고, 너의 ‘배우자를 버리는 것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버림받은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섞여서 살려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얻었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과 나눌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얻은 사람을 버렸다는 것은 그 몸이 갈라지고 생명이 끝난 것과 같습니다. 버린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하는 것은 내가 사람을 얻은 후에 버림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바울의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일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과 사랑하심과 선하심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오직, 주의 구원하심을 알려주기 위해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처럼, 율법에서 벗어나는 데에 거리낌이 없으나 때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킵니다.(“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0)
사람이 한 번 경험한 것은 잘 잊지 않습니다. 경험했다는 것은 몸이 익혔다는 것입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넘어지는 반대쪽으로 기를 써서 몸을 기울이지만 여지없이 넘어집니다. 그러다가 넘어지는 쪽으로 몸을 같이 움직였더니 넘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던 경험을 한 사람은 자전거를 타는 데에 재미를 붙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을 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 16:1)는 말씀을 바울이 온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나쁜 짓을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못된 짓을 하는 사람도 자기 생각 안에서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계획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고 자신을 속입니다. 사람의 계획은 언제나 자신에게는 최선이지만 주님께도 그럴지는 잘 모릅니다. 이러한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종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하나를 얻으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사람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독생자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과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맞바꿨습니다. 한 사람을 얻으려고 온 세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당신의 생명조차도 내어주며 섬기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잠언서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겸손하게 할 것을 권면합니다. 지혜자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합니다.(2절)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문제없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은 자유롭게 하며 어떤 생각을 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은 그 행위의 원인이 되는 마음까지를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절제된 깨끗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살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서 악을 떠나 살 것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경영’ 곧 마음의 관리를 바르게 하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 말씀은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말씀들을 하나하나 들추어 상기시키시면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48절까지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인들이 율법을 알기는 하지만 그 이해와 실천에 있어서 지극히 문자적으로만 알고, 형식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말씀의 정신을 바로 깨닫고 실행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준수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만 문제가 없으면 되는 것으로 인식했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형식의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내면적 동기’ 자체가 우선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인하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내면적 동기가 되는 미움을 마음에 품는 것과 살인을 실행에 옮긴 것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어서 미움을 품는 것만으로도 심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셨고(21-26절), 간음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문제없는 것이 아니라 간음의 내면적 동기가 되는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 간음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음욕을 품지 말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맹세에 대한 가르침도 율법에서는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한 것에 비해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35절)고 아예 못을 박아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그 근본을 차단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순식간에도 하늘을 날기도 하고, 지옥에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생각은 우리들의 행동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근원적으로 그런 잘못된 마음을 품지 말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절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절제된 말과 절제된 행동이 필요한데 더 나아가 절제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서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세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절제를 통해서 다를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절제는 멈추어야 하는 곳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자유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했다고 했습니다. (고전 9:12)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절제할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특별히 힘을 가진 자들은 무엇보다도 절제를 잘 해서 약자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주지 않도록 삼가고 또 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절)
'주일낮예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때에 (0) | 2022.09.11 |
---|---|
하나라도 잃지 않는 것 (0) | 2022.09.04 |
차별을 넘어 (0) | 2022.08.21 |
희망을 바라 봄 (0) | 2022.08.14 |
관습적인 사랑 너머 (0) | 2022.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