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1-8(참고 욥기 19:23-27; 고린도전서 15:1-11; 마가복음 15:42-47)
들어가는 말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리고 장애인주일이기도 하며, 4.19혁명이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이규재집사님과 장로님들께서 3층과 당회실에 페인트 작업을 해주셨습니다. 얼룩지고 푸른고 검은 곰팡이로 보기싫었던 공간들이 장로님과 집사님의 붓질을 통해서 밝고 환한 공간으로 변하는 모습속에서 전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죄와 허물로 가득은 우리의 죄를 죄 없으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못봐줄 것 같던 공간이 하얀 페인트를 통해서 거듭나 뽀얗고 예쁜 공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 자신이 변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수고하신 분들의 손길을 통해서 얼룩과 곰팡이가 벗겨지고 청소되어지고 페인트 칠 되면서 새로운 공간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의 은혜의 십자가를 통해서 변화되기를 소망하며 그 모습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함께 누리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둠 조차도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의 권세 가운데 두지 않으시고 그분을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로마서와 베드로전서에서도 이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롬 6:9),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벧전 1:21)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총독부터 처형을 맡은 군인들과 장례를 지켜봤던 여인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할 거라는 소문을 우려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모두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고, 좌절과 절망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탄식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희망의 빛을 바라볼 수 없는 어둠을 맞이한 사람들의 모양의로 쓰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이기에 이들이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해야할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경험해야할 지옥의 불못을 맛본 것입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뭍히시고 그가 지옥에 까지 내려가셨다 라고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와같이 심판의 죽음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맛보아야할 모든 것을 맛보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권세 마저도 그분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바로 그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부활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이나 지옥의 권세 마저도 그분을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을 세상은 무덤으로 그분을 가두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부족입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을 죽음 가운데 가둘 수 없고, 그분의 영광을 가리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오늘 우리도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아직 멈추지 않았고, 코로나의 질병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경제불황과, 사회적불안 등 수많은 어려움들이 우리의 삶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있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집중폭우, 이상기온, 산불, 꿀벌들의 집단 실종, 기후변화로 인한 농산물의 변화등 기후위기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연이 주는 경고이자,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약속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그 부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없이 자신이 살아니실 것을 이야기 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마 17:22-23)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어둠만을 생각하고 세상의 문제만 생각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들이 행했던 전래대로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 부패와 냄새를 방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덤의 돌을 누가 굴려줄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삼일에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한 약속은 기억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장면, 그 죽음 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걱정, 두려움이 그들의 눈을 막았고, 그들의 생각을 막아서 그들은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모습 가운데서도 의심이 찾아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절망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사흘이 된 그 새벽에 무덤을 깨뜨리고 일어나셔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인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의 돌은 이미 구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근심과 걱정이 헛된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영안이 열리지 않아 어둔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기에 주님이신줄 깨닫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기에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바라 보지 못했습니다. 약속에 대한 소망도 믿음도 없기에 그들은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도 믿지도 못하고 오히려 의심만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꾸짖으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4절)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의 눈이 없다면 주님의 부활은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그 기쁨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권을 소유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16절)
이제는 복음의 증인으로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포하심입니다. 죽음의 어두움이 더이상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으며, 하늘나라의 소망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우리는 더 이상 눈물로 세월을 지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우리는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들도 동일한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립 3:21)
주님의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 몸으로 우리도 변화될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그럼므로 우리도 변화된 몸,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할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시나니"(고전 15:42-44)
나가는 말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만의 부활이 아닌 바로 오늘 이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이요. 하늘나라를 향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입니다. 이 믿음을 소유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온전히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처럼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는 전와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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