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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지기의사랑 2008. 3. 16. 00:52

마가복음 11:1-10(신약 73면)


   오늘은『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구약 아가서 7:7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키와 유방을 가르쳐 종려나무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 도시라고도 하고 카톨릭에서는 종려나무를 성별 하여 성수(聖樹)라고도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Golden Gate)이 있습니다. 아치형으로 된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호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은 아마도 로마의 정부가 정복되고 이스라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꿈과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력한 왕, 군사와 권력을 가진 왕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다윗이 구원했던 것처럼 구원하며, 번창할 것을 갈망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담겨있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호산나”라는 말을 통해서 그들의 갈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해마다 유월절 축제가 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기원을 나타내는 여섯 편의 순례 시를 노래 중의 일부입니다.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번영 했던 시절, 다윗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금의 고난과 속박 속에서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을 보내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메시아사상이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성전에 입성하시는 모습 속에서 어쩌면 개선장군이 성에 입성하던 모습을 떠올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들의 모습은 매우 수선스럽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절)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개선장군이 탄 힘이센 말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가지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화려한 예수를 소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을 상상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큰 말이 아니라 작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서툰 모습의 나귀의 등에 타셨습니다. 당나귀의 특성은 유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에게 지워진 짐을 옮깁니다. 나귀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개선장군이 아니라 묵묵히 섬기는 자로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이시고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가야할 길, 자신의 길을 처음부터 나귀의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보이고 싶었지만 화려함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무력으로 전복하는 승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한 나귀처럼 자신에게 지어진 십자가를 지신분입니다. 어린 나귀, 서툰 나귀의 모습으로 비척거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려주일은 우리가 꿈꾸는 화려한 승리로의 입성이 아닙니다. 겸손한, 묵묵한 모습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서의 승리를 말하고 싶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미 이에 대해서 예언하였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스가랴 9:9)

   

   그분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화려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나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채찍에 맞고 고난을 견디신 왕이십니다. 그는 출생으로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늘 겸손한 왕의 모습을 잃지 않았던 분이십니다. 교회 역시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조금더 자숙하며, 주님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하시던 그 음성으로 종려주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는 호산나는 바로 강력한 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왕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이 땅을 이기기 위해 오신 참 승리의 주님을 기억하고 기리며, 기다리는 호산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나라 vs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은 다윗의 화려한 나라, 강력한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화려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강력하고 힘있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군대의 환영을 받지 아니하시고 서민들의 소망을 가슴에 담고, 가난한자, 과부, 고아와 같은 심령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세리와 죄인의 얼굴을 하고 그러한 가슴으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며 살아가는 소외된 인생들이 함께 더불어 하늘을 바라보며 기쁨을 나누며 살아가는 참 구원의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몸의 구원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원을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나라를 꿈꾸시고 시작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이루었던 잠시 잠깐의 태평성대가 아니라 그의 십자가로 이룬 영원한 승리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물과 피, 온 생명을 던지시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참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신 개선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10절) 라 외쳤지만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생명이 넘치는 나를 주시기 위해서 죽음의 골짜기 골고다를 향한 첫 걸음을 내 딛으신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사망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내딛으신 입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금 더 겸손한 모습으로, 조금 더 주님을 기억하는 한 주 속에서, 인생속에서 하나님의 참 나라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진정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얻게 하시기 위해 입성하신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나라를 굳게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디모데후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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