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참된 예배

꿈지기의사랑 2006. 7. 16. 09:04
아모스 5:18-24


여호와의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사모했습니다. 왜냐면 이날은 메시야의 날로서 원수인 이방인들에게는 심판의 날이며, 그들에게는 해방과 환희의 날이라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여호와의 날을 하나님께서 이방 열강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로 정치적 맹주의 위치에 오르도록 하시는 날로 오해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타락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것만을 즐겼습니다. 주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의인과 악인이 구별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드러날 것임을 깨우쳐 줍니다. 그날은 의인에게는 기쁨과 승리가 주어질 영광스러운 날이지만 죄인에게는 캄캄한 흑암이 휘몰아치는 멸망의 날입니다. 세상의 죄된 모습에서 자신을 지키면 영생이 주어지겠지만 사단에 매여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벌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날을 진정으로 사모한다면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이기에 삶을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로 함께 하실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또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백성이라는 사실도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을 진심으로 사모한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의 옷을 벗고 성화되어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날을 준비하는 삶으로 받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나누기를 더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은 각 사람이 선악간에 행한 모든 행위가 선명하게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악재가 겹치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사자를 피하여 도망하다가 곰을 만나고 겨우 곰을 피하여 안도하며 손을 집는 순간 뱀에 물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무니만 신앙인이 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합당한 삶이란 먼저 회개하는 삶을 말합니다. 죄를 가지고는 심판의 자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그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가증한 제사는 이제 그만


   예배란 무엇일까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본래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러운 것이 선하신 분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각종 제사 규정들입니다.

   절기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시는 데,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절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절기에 드려지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는 거창한 종교의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구하는 마음으로 달려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께 단지 제물만을 드리려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번제와 소제 화목제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번제와 소제는 지은 모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행위를 제사로 표현한 것인데, 그들의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라 위선과 가증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이제 화해하고 하나가 된 것을 감사하며 드리는 제사입니다. 즉 감사의 예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물들이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서 드려지게 된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와 제물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체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삶은 부정과 불의로 형편없이 오염되고, 생활은 탐욕과 거짓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열성적인 종교해위(예배)만 드리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해도, 아무리 열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해도, 현란한 몸동작과 현란한 찬양, 수많은 악기를 동원한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예배일뿐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소음공해와 같은 것이요. 부질없는 자기과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들을 기뻐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모습, 삶의 자리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잠언 15:8)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2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예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일에만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드려지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처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살아감에 있어서 공의와 정으로운 삶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서로가 한 몸이라는 공동체의식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특히 지도자들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덕목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의식이 사회전반에 흐를 때 사회가 건강해지고 특히 약한 사람들이 보호됩니다. 따라서 한 사회의 공법과 정의의 척도는 약자가 얼마나 보호되고 있는가가 그 기준이 된다.

   공동체의식(공법과 정의)은 풍부한 수량으로 넘쳐흐르는 물줄기같이 저지되거나 막힘이 없어야 하며, 가뭄에도 전혀 마르지 않는 강과 같이 쉼 없이 지속적으로 흘러내려야 합니다. 공동체의식은 마치 인간의 피와도 같습니다. 인체 내부 모두에 혈관이 연결되어 있고 이를 통하여 온몸에 피가 흐르고 있다가 그 피가 멈추거나 부족하면 인체에 치명적인 것과 같습니다. 종교적이며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는 제사(cult) 혹은 예배(worship)가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배척 당하고 오히려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공법과 정의(공동체의식)가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합니다. 이웃 사랑 없는 예배는 하나님 없는 예배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예배의식 자체보다는 공동체의식을 실천하는 삶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통하여 형성된 하나님과의 공동체의식은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공동체의식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바울인 말하는 산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로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아내를,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며, 이웃과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는 삶을 말합니다. 특별히 좋은 것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나누십시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기회가 생기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나누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