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8-14
사랑의 원리
바울은 사랑의 대 원칙을 강조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절)
사랑의 정신을 모든 일의 기초로 한다면 율법을 다 완성하는 것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정신(9절)만을 가진다면 그야말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도 알수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남을 자기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자기 몸을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남들을 미워하지 않고 아끼고 돌본다면 어떻게 싸움이 있고, 미워함이 있고, 소란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결국 그리스도의 정신적 생활원칙을 그리스도의 것과 일치시킨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원리입니다.
예화)얼마전 대구의 70대 노인이 자신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벌어온 1천만원을 불우한 고아들을 위해서 기탁한 기사가 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을 자신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 결론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신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19)
사랑의 대상은 누구?
예화)며칠 사이 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을 구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한 결같이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향해서 발걸음이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러한 생명을 건 사랑으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영혼이 구원의 기쁨을,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사랑의 빚을 하나하나 갚아가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사랑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입니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은 믿는 형제들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그들의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고 까지 여겼고 그들은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이들이기에 그들과는 상종하는 것 조차 가치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이며, 모든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빚'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웃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신앙의 생활을 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국한되어진 것이 아니라 믿지 않고 믿음의 형제 자매가 되기를 위해서 기다리는 이들에게 조차 포함되는 것이며, 우리가 원수처럼 여기는 그들에게 조차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들까지도 우리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랑 속에서만 율법의 완성은 가능합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마음속에서
바울은 신도들이 가져야 할 시대의식을 촉구하며 거기에 따라서 마땅히 가져야 할 생활태도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시간은 종말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 종말이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 아니 바울의 심정으로는 종말이 급속하다는 느낌 속에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11절)
처음 믿을 때, 즉 세례를 받고 주님을 영접한 그 시기를 가리킵니다. 초대교회에서 믿음을 갖
는
것과 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었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보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매일
주님의 재림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세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날마다 가까워 오고 있으며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임산부가 산달이 가까웠지만 언제가 출산일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두움의 일을 벗자고 말합니다. "깨어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4)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죄된 삶의 모습을 벗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삶의 모습과 틀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어둠의 일은 무엇입니까?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쟁투와 시기함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죄된 우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사실 종말이 당장에, 혹은 내일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종말에 처한 신도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밝은 날 곧 선과 참과 아름다움만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가 밝아오는데, 거기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의당 그 나라에 합당한 밝음, 깨끗함, 선함을 옷입듯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닮아 그를 옷처럼 입어서 남들이 우리를 볼 때 그리스도로 착각할 정도로 그리도를 뒤집어 쓰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에서 보여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종말의 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종말의 때가 곧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날마다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살마들에게 술취함과 방종, 시기 등과 같은 일들은 사소한 것들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뿐이며 그 때에 율법은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