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마음으로
누가복음 19:1-10(참고 이사야 54:1-8, 로마서 6:15-23 / 20250622)
들어가는 말
오늘은 총회가 재정한 6.25민족화해주일입니다. 성령강림후 둘째주일이기도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갈등 구조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게는 가족 구성원간의 말다툼으로부터 층간소음, 남녀의 갈등, 중단될 줄 알았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과 같은 국제적인 분쟁들의 악화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을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려운 일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해결되는 것을 ‘화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화해란 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서로 나쁜 감정을 푸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화해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도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인간은 갈등 속에 살아간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직업은 *세리장이요, 환경은 부자였습니다.(2절) 사회적인 모습으로만 보자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가진 자입니다. 지위와 명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과연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물질은 많이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참된 친구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권세는 있었지만 존경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같은 민족들의 사랑과 관심과 존경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세리나 세리장들은 친로마적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지정된 세 보다 많이 걷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 '로마의 개'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법을 악용하거나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렸습니다. 삭개오는 물질과 권력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웃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채우지 못하는 허전함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만나야 할 사람, 받아야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사랑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이름과는 다르게 그는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세리장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아라, 저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구나”(눅 7:34)라고 예수를 비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처럼 예수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세리라는 표현은 죄인의 대명사처럼, 죄인과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갈등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7) 이 한 구절이 사람들이 삭개오라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갈등의 구도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러나 그에게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군중들이었습니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포기하겠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씩씩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해서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 찾고자 하는 갈망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작은 키를, 자신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사 55:6)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돌무화과나무’라고 번역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나무로 미라 케이스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지위와 체면과 자신의 장애를 모두 생각지 않고 그는 오로지 주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삶의 장애가 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구원을 향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는 그의 갈망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만나기를 소망하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만남으로 그의 인생에 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자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을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만은 달랐습니다. 그를 인정하고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러러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왜 예수께서 삭개오를 특별히 선택하셨는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먼저 부르셨습니다. 결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온전히 은혜일뿐입니다. 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외면과 비난을 받아오던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신이 나서 부리나캐 내려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 모습은 가히 잔치였습니다. 진수성찬을 마련하여 예수님을 대접합니다. 늘 불안과 근심과 멸시받는 상한 마음으로 살아가던 그가 이제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는 인생이 변했습니다. 근심하던 인생이 구원의 기쁨으로 인해서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이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의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눅 19:8). 늘 지옥같던 그의 마음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인해서 천국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삭개오의 이런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로마서 6:17-18) 예수를 만나고 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죄에 종된 삶을 살던 그가 이제는 의의 종으로 살아갈 삶의 의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가지게 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사랑의 연쇄반응으로 타자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거듭난 마음으로
삭개오는 은혜를 받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동안 움켜쥐고 살던 손을 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구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가난한자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고, 빼앗는 일에 힘썼던 그가 이제는 변화된 삶을 결단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하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보통 랍비들은 소유의 20%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절반을 주겠다고 한 것은 그가 크게 뉘우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철저하게 이웃을 돕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는 토색(등쳐먹는일, 강제로 빼앗는 일)하던 일을 그치고 이제 그들에게 4배로 값는 삶의 변화,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남의 것을 자발적으로 변상할 때는 5분의 1만큼을 더하여서 *변상하고 벌금인 경우에는 4배에서 5배정도의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중하게 여겨 그러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믿고) 변화된 삶으로서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던 삶을 포기하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려고 애쓰며, 그들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면서 그 가정에 구원이 임했으며 이제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 즉 믿음의 사람이 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삭개오는 구원받은 사람의 참된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죄의 종이었던 삭개오가 오늘 의의 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보시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 19:9).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롬 6:17-18).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삭개오 같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의 변화를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 구원받은 자로서의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이사야 54장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사 54:7-8).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가렸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대신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풀어 주시는 긍휼, 사랑(헤세드, חֶ֥סֶד)입니다. 눈앞의 이익, 풍요, 물질에 대한 탐욕, 부패와 비리 등은 우리 사이의 불신과 갈등을 조장할 뿐입니다. 진실된 이웃 사랑에 바탕을 두어 정의를 세우며, 평화를 일구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삭개오의 변화를 통해 깨닫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함께 지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또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그런 궁극적인 변화가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이사야 54:10)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통해 가정과 사회와 더 나아가 남과 북의 갈등, 그리고 전쟁중에 있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관계가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