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마태복음 6:5-15(참고 이사야 55:6-13, 베드로전서 1:13-21/ 20240915)
들어가는 말
오늘은 남신도주일이면서 한가위감사주일입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입니다. 옆에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건강한 명절, 행복한 명절 되십시오. 주보에 소개해드린 시처럼 고향을 떠난 이는 외톨로 떠돌아 외롭고 남은 이는 다 떠나서 서럽단다 정들면 어디든 고향이라지만 미물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데 못내 가슴에 고향을 키우는 은빛 연어도 선영하(先塋下) 어버이 발끝에 앉아 고향을 가슴에 심는다 눈에다 고향을 담는다(이승복의 한가위엔 연어가 된다 中 일부)
어렵고 힘든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아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구에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수구초심이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함께 묵상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라(5-8절) : 보여주기, 많은 말 하기
본문의 전반부에서는 믿음과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지 말아야 할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한 삶에 대해서 마태는 위선적인 삶이라 말합니다. 위선적인 삶에 대해서 두 가지를 경고합니다. 첫째는 '보이려고' 하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즉 보여주기식 삶입니다. 기도를 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 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드리는 기도의 동기와 목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휴포카리테스)는 '휴포'(위에서)라는 말과 '카르스테'(연극자)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기 위해서 연극을 행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들은 그들의 기도의 동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함이 아니라 그 목적이 '사람'을 향해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란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자신을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잘 보이는 곳에 올라가 연극을 행하는 사람처럼 회당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많은 사람이 보아주고 인정해 주는 곳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 거리의 어귀 즉 드나드는 목의 첫 머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목적을 두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의 모습은 '중언부언'입니다. 중언부언(βατταλογησητε, 바탈로게세테)이란 "같은 말을 의미 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말을 반복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같은 기도를 드린 적이 있으십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반복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미없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중언부언이란 바로 이러한 증상에 걸린 환자처럼 의미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되 뇌이는 것을 말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갈멜산에서의 바알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불을 내려달라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다는 일과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을 반대하던 에베소 사람들이 모여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34절)라고 외치기를 두 시간이나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중언부언에 가까운 말들입니다. 본문에서도 위선자들이 중언부언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절) 진정한 열망없이 말만을 반복하는 형식적인 기도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기도를 드립시다. 골방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다만 다른 사람을 곁눈질하지 않고, 또 자기 도취에 빠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온 마음'으로 온전히 전념하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상실한 신앙을 위선적인 신앙이라 말합니다. 그들을 본받지 말라(8절)고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길따라가기(9-13절)
우리가 믿음과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길이 우리의 뜻과 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길, 불의 한 자의 길을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당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우리는 외적인 것에 신경을 씁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즉 외식하는 자의 자리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보이려 노력하고, 의미없는 말을 반복하며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이라며 착각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계십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베드로전서 1:17) 예수님은 오늘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의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기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이 세상에서 용서하고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악한 길로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참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며, 과거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던 생활이 너무 싫기 때문에 다시는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집니다. 그리고 새롭게 주님과 시작한 생활이 너무 좋고, 또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므로 다시는 죄된 생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집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이전의 삶으로부터 확고하고 신속하게 벗어나겠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보는 시각, 관점, 삶에 대한 해석‘의 갱신을 뜻합니다. 세속으로 둘려싸여 있고 또 그 세상 속에 흩어져 있는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뿐 아니라 그 세상을 바로 해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근신한다는 것은 믿음의 중심을 세우지 않고서는 온전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 수 없음을 알기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서게 됨으로 믿음이 견고해질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통 하나님께(14-15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나라를 갈 망하는 삶, 매일의 양식에 만족하고 죄지은 자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삶, 시험과 악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결단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과 다른 하나님의 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드러나는 것들을 중시하며 살아오던 베드로의 말처럼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벧전 1:18)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어진 것"(벧전 1:19)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를 맛본 자들입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에 편협하지 아니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지향점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함을 받고 새로운 삶의 길, 믿음과 소망을 발견한 자로서 우리도 용서하는 넉넉한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진정한 소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55:12-13)
나가는 말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매순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더욱이 믿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보여주기 식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 다운 명절,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마음으로 관용하고 포용하는 명절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