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빠르도다
스바냐 1:14-18(참고 베드로후서 3:8-13, 누가복음 17:20-37)
들어가는 말
갑작스러운 폭우로 여기저기 사건 사고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제주도에서는 차량이 침수되고,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해 도로가 침수됐고 한라산에는 7개 등산로 출입이 통제되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장맛비가 내린 제주도에서는 현재까지 도로나 주택 침수가 30여 건 신고됐고 강한 바람으로 인한 가로수 쓰러짐 신고도 2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때면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거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오후까지는 비 소속이 있으니까 피해없도록 잘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후 여섯 번째 주일이 되는 날입니다. 엊그제 시작된 성령강림절인 것 같은데 벌써 7번의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말씀을 묵상하며 함께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날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
스바냐 선지자가 등장한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개혁이 일어났던 시기였습니다. 요시야 왕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반대로 이야기 한다면 영적인 암흑기에 빠져 있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발버등 치는 삶을 살려고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한 인물이 요시야 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개혁 직전에 나타나 활동했던 인물이 스바냐 선지자입니다. 우상숭배와 산당 숭배로 가득하던 시기에 요시야 왕은 등장하는데, 당시 강대국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신흥 바벨론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과도기적인 시기에 요시야는 왕위에 오른지 12년 차가 되는 20살의 나이에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전국의 산당과 지방 성소들을 정화하고 우상숭배를 척결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바냐는 이러한 왕을 돕는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당시 유다는 총체적으로 부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을 예고하시며 경고하셨습니다. 경고란 어려움을 겪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알림입니다. 즉 경고가 주었졌다는 것은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 베드로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즉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재난의 상황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알림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그리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속히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그러나 유다는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12절) 자신들이 죄를 범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임하지 않고 자신들은 평안할 것이라고 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감지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변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변화는 이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만이 일으킬 수 있는 일입니다.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이 가깝고도 빠르다고 경고함에도 그들은 전혀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불감증에 걸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왜 우리는 이러한 여호와의 날이 오기전에 주어진 기회를 잘 살려야 할까요?
영적인 불감증에 걸린 우리에게 임할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 아닌 화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스바냐 1:15-16) 여호와의 날은의 참상은 용사가 슬프게 우는 것입니다. 용사는 ‘강한 자’입니다. 자기 힘과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할 때부터 하나님의 경고는 들리지 않습니다. 점점 위기만이 다가올 뿐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견고한 성읍과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며, 성읍과 망대는 전쟁을 대비하는 것들입니다. 인생을 준비하고 살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어떤 승리도 성취도 이뤄 낼 수 없습니다. 인생의 승리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영적인 맹인이 되면, 하나님이 안중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죄악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파멸의 길로 달려가게 됩니다. 말씀에 의지하며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복된 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17장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경고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누가복음 17:27-30) 그렇기에 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잘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금과 은같은 재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물질주의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주소이고 오늘 우리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라면 우리의 미래를 암담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 하십니다. 사람이 염치를 상실하면 불의한 행동에 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가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감각을 회복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가 아닌 겸손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손은 자기 판단과 능력으로 부족함을 깨닫고 매 순간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삶의 기준과 방향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러한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통해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는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해 요소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가깝고 빠르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그 기회를 붙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