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는 분

꿈지기의사랑 2023. 9. 25. 00:43

마태복음 14:22-33(참고 욥기 37:14-24, 로마서 9:14-26/20230924)

들어가는 말

   ‘덮다’ ‘덮다’ 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불을 끌어당기고,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가을 들녘의 곡식들도 여물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유의 명절을 앞둔 주일입니다. 창조절 네 번째 주일이면서 한가위감사주일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힘겨운 우리의 삶의  시절에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힘주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함께하시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통한 충만한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물에 빠진 것 같은 인생의 고난-두려움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고난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괴테

   우리가 주님 말씀에 순종해도 고난과 풍파가 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핀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은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먼저 강 건너로 가라는 예수의 말씀에 그들끼리 강을 건너고자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그들의 여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때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어둠 가운데 물 위에 선 사람의 형체를 발견한 제자들은 유령으로 착각했습니다. 제자들의 착각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로, 어둠이 가장 짙은 시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강물 위를 누군가 걸어오니 유령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짙은 어둠으로 인해 형체를 구별하고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주신 말씀이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제자들을 진정시키는 말씀이었죠. 그러자 베드로는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다 나섰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허락하니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이내 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기 맘대로 배를 타고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고난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새벽 3∼6시경, 모든 기력과 용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 바다 한 복판에서 파선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5절)

두려움의 원인 – 바람

   그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심으로 베드로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목할 것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예수님의 구원이 혼재하는 바로 이 순간. 오늘 성경은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를 “바람”을 보았기 때문임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던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그들을 괴롭혔던 바람의 존재를 다시 의식하기 시작하니 결국 물속으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는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기고, 걷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지만, 정작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예수님을 보던 시선이 주변으로, 바람으로 옮겨 갔고, 결국 물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이런 행동을 두고 예수님은 “의심”으로 선언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을 보았을 때는 믿음이 있었는데,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되니 의심이 꿈틀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의 본질은 바람이었습니다. 이 바람은 강을 건너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과 만나기 직전까지 제자들의 길을 괴롭게 하던 원인이었습니다. 강물을 요통 치게 하고, 평안을 깨뜨린 주범이 바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바람이 예수님과의 만남 가운데도 그 힘을 발휘하여 베드로를 물속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누구에게 요청했습니까? 바다입니까? 바람입니까?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주여 나로 오라 하소서’ 간구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베드로도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면 물 위를 걷는 놀라운 역사를 베드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베드로의 시선이 움직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였던 베드로가 그 시선을 주변으로, 바람으로 돌리니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빠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의심이 되어, 결국 베드로를 물속으로 빠지게 만들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믿음이 서야 할 자리에 걱정이 자리 잡고, 의심이 자리 잡으니 결국 불신앙의 결과를 만들었고, 베드로의 도전도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구원하실 분을 바라봅시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예수님께서 그를 붙잡아 일으켜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시고”(31절)

   그리고 배에 함께 오르자 모든 풍랑이 그쳤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럴듯하게 포장된 어떤 이론과 논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눈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하고 환경의 열악함과 조건의 불리함을 보면 우리는 다시 풍랑 속에 잠기게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잠시 환경에 굴복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려 풍랑 속에 잠긴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께 즉시 부르짖어야 합니다. 긴박하고 애절하게 우리를 구해달라고 하소연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이렇게 부르짖으면 우리 주님께서는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나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 드니라”(마가복음 1:31),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마가복음 9:27)

   믿음의 본질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하나님을 맞추고, 예수님을 끼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이며, 한 걸음 한 걸음 그리스도의 진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바람과 풍랑을 이겨낼 때 비로소 놀라운 믿음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서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고, 행복한 가정의 단란함과 풍요를 잃은 상실감에 사로잡혀, 그 행복과 풍요를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욥의 부족함과 좁은 소견을 오늘 구약의 말씀은 증거 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서신서는 잘못된 자기중심적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진정한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뜻을 받드는 데 있음을 비유를 통해 증거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덕목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내적인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요, 빨리빨리 서두르며 재촉하는 모습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의 반석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차분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견딜 수 없는 고난도 이겨내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거룩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예견하고, 판단하는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믿고, 인내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묵묵히 주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 뜻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며 즐겨 쓰시는 질그릇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는 거룩한 질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자랑과 기쁨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