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은혜를 기억하는 삶

꿈지기의사랑 2023. 8. 6. 12:30

누가복음 18:9-14(참고 출애굽기 12:51-13:10; 로마서 3:21-31)

 

들어가는 말

 

   여름에 많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외선을 피하기 위해서 색안경(썬글라스)을 쓴 사람들입니다. 멋스럽기도 하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에도 색안경을 끼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관이나 편견에 사로잡혀서 세상을 본다는 뜻의 좋지 않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만함의 기도자 바리새인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이름이 달려있기도 합니다. 본문을 시작하는 첫 문구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자기를 의롭하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기도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1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가 색안경을 끼고 죄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과 자신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에게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의 장에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는 특별한 인식이 강했던 사람이었기에 죄인들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없었고, 부정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는 당당하게 기도합니다. 토색, 불의, 간음 하는 자들과 다르고, 세리와도 다른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11) 그리고 그가 또 자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며 자랑하듯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사람들과 구별되어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이들을 폄하하고, 색안경을 끼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이러한 행위들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24)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말한 것처럼 대단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었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능력이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피의 사랑,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길이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 공의로우심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7-28)

 

가슴을 치는 신앙인이 됩시다.

 

   가슴은 사람의 신체 중심에서 자리하며 중요한 장기가 자리입니다. 성경에서 가슴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는 성경에서 몇 가지의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 슬픔과 애도를 나타냈습니다. 어느 나라든 가슴을 치는 행위는 슬픔과 고통을 뜻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슬픔을 표시하거나 죽은 사람을 애도(哀悼)할 때 가슴을 쳤습니다. 둘째, 후회와 탄식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극한 어려움에 처할 때 가슴을 칩니다. 이사야 32:12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포도원과 밭을 잃게 됨으로 가슴을 치게 될 것이 예언하십니다. “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이사야 32:12)” 또한 나훔서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나훔 2:7) 세 번째 경우는 회개할 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때도 가슴을 칩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음을 표현하면서 가슴을 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7) 그리고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가슴을 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은혜를 구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우리의 실존 즉 죄인임을 깨닫고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함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리새인과 같이 자신을 높이는데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울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교절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통해서 애굽과 싸워 이김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을 베푸셔서 이스라엘이 해방을 얻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사건의 주체는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혀줍니다. 하나님이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하시는데 무교절은 갑작스럽게 맞게 되는 해방 탓으로 시간을 기다려 빵을 맛있게 구울 수 없었던 상황을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교절은 빵에 효소를 넣어 부풀리지 않는 밀가루 전병(煎餠)입니다. 밀가루 반죽에 효소를 넣어 부풀린 부드러운 빵을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교병을 구워먹고 애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때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해방임을 확실하게 각인(刻印)시키려고 무교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무교절 한 주간(週間)은 유교병과 누룩을 보이지 않도록 해서 딱딱한 무교병을 먹으며 해방의 감격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은혜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통해서 구원얻은 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대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신 절기가 무교절입니다.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잇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졌음이니 해바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출애굽기 13:9-10)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자기를 높일 수 없습니다. 세리와 같이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하고, 은혜임을 기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9:14)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자신을 낮추는 자리에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