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구가 되어
요한복음 18:12-27(20230305)
들어가는 말
오늘은 교회의 창립116주년 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절기로는 사순절의 둘째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의 기간에 하나님이 은혜와 주님의 긍휼을 돌아보고 내 안의 죄된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몸 상하는 일 없이 건강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어제는 창립주일을 앞두기도 하고, 봄을 맞는 시기이기도 해주서 교회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나무를 전지하고, 화단의 풀을 뽑고, 본당을 청소하고, 화단을 꾸밀 돌을 제공해주신 권사님, 미장으로 수고해주신 권사님, 옆에서 도와주신 장로님들과, 집사님, 여러분들이 함께 도와주셔서 정리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 분들의 헌신을 통해서 교획 이루어져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수고하신 그리고 교회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해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이르게하는 길 : 예수 그리스도
인생의 문제 중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들을 해왔지만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예수님이 무고하게 잡히고, 재판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끌려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가야바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끌려온 것이 그들의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14절)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함으로 죽으실 것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누군가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죽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온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정죄하고, 고발하는 대제사장 무리들의 논리가 얼마나 빈약하고, 무리한 것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겁박하고, 폭행하는 것 외에는 없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 :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도구
예수님이 잡히시던 순간 옆에 있었던 베드로는 몰래 예수님의 재판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준비되지 않은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호헌장담하며 그럴일 없다고, 자신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고,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드러냅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 "주여 내가 주와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33) 그러나 그는 안나스의 뜻에서 함께 불 쬐던 문지키는 여자에 의해서 이러한 다짐이 무너집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는 질문에 놀라며 ‘나는 아니라’ 대답하고 맙니다. 주변에 섰던 사람들이 또 한번 질문합니다. ‘너도 그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다시 부인합니다. ‘나는 아니라’ 그러자 이번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산에서 귀를 잘랐던 사람(말고)의 친척이 ‘네가 그 사람고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질문하자, 그는 한 번 더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닭이 울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 앞에, 세상 앞에 무력한 것이 인생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 앞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러한 우리 임에도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원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연약함과는 전혀다른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능력을 베풀며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미문의 걸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서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보입니다. 놀라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고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향한 도구일 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루신 것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가 경험했던 안나스의 마당에서의 부인은 베드로를 더욱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오히려 회개하고 우리가 죽음으로 내몰았던 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가운데 살리셨던 사실을 목격하고, 경험한 증인으로서의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뿐 아니라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속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선지자를 통해서 알게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이루어지는 것이라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 선포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라 베드로는 전합니다. 그 회개의 시발점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라 증거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가장 먼저 경험한 존재로서 나아가 그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허락되었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교회 활동이 힘들고, 장래도 어두운 이 시대, 우리가 할 일은 베드로와 같은 진심 어린 회개와 결단이요, 그 은혜에 합당한 헌신과 충성입니다. 핍박과 박해가 넘치던 때 은혜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 들고 담대히 나가 증언하고 증거하여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거듭났고, 초대교회 부흥의 선봉에서 헌신했음을 역사는 증거합니다. 그와 함께 초대교회는 성장했고, 그와 함께 성도들도 변화 받고, 결단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입은 베드로를 통하여 제2, 제3의 베드로가 등장하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나가는 말
베드로를 증인으로 삼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곳 용산에 116년 전 용산교회를 세우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도구로서 용산교회를 세우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