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요한복음 3:1-15(에스겔 11:14-20; 로마서 6:3-14)
들어가는 말
부활절둘째주일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우리에게 속삭이듯 화창한 아침햇살이 우리를 반깁니다. 화창한 날씨처럼 우중충하던 코로나의 상황과 경제적이 어려움,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회복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기본이요 확고한 중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롬 6:5)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게 살게 되었다,(11절)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다만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표적을 좇아온 한 사람
본문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한 유대의 지도자라는 표현으로봐서 그는 유대인의 최고 종교회의 기관으로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백성의 지도자들(원로)로 구성된 71명의 기관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찾아온 시간은 밝은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밤에 찾아왔습니다. 드러내놓고 예수님께 물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예수님의 행적을 쫓았던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그는 랍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예수님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2절 상) 즉 그는 일반적인 선생이상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는 표현은 그가 선지자, 혹은 그 이상의 분이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을 일반적인 선생을 초월한 분으로 하늘에서 오신분이라면 혹시 메시야가 아니십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이러한 분으로 인식하고 찾아온 것일까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것을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며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하) 즉 예수님께서 첫번째 유월절 기간에 보여주신(2장)의 사건들을 보고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가 아닌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다른 복음서들은 기적이라 표현했고, 본문에는 표적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기적(뒤나미스)과 표적(세미온)은 의미가 좀 다른데요, 기적은 '놀라운 사건'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표적은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어로는 세미온이라 표현했고, 영어로는 'sign(사인)'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장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요, 첫번째가 가나 혼인잔치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1-12절)이고, 두번째가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13-22절)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은 유대교의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행사가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있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잔치로 변함을 보여주고, 성전 정화사건은 하나님과 교제가 없이 예물을 드리는 것에 집중된 그들의 예배 행태를 꾸짖으시며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곳, 진정한 예배가 되는 현장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통해 돌로 된 것물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보여주실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로 그 표적을 좇아서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러한 표적을 좇아온 니고데모를 향해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고 하십니다. 진리에 목말라 있는 니고데모를 향해, 아니 죽어 있는 인생을 향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거듭남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새로워지는 경험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니고데모도 이해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물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세례를 말합니다. 즉 씻는 것을 말하는데, 유대인들의 전통에 있어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서 물에 자심을 잠금으로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성령을 말한 것은 육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부분도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새롭게 변화되는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에스겔 11:19-20) 즉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포함한 삶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돌과같이 단단하고 교만한 마음이 부드러운 살과같이 겸손한 모습으로 회복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길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삶으로 고단한 그들에게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 된 원인과 이제는 하나님께서 참된 성전이 되어주실 터이니 내가 보내는 성령을 통해서 너희의 삶이 변화되어야 그곳에서 함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알지 못하느냐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6:3-4)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로마서 6:6-7)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사람의 방식과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준비가 된 사람, 이것이 거듭남인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성령을 경험하고 그것으로 새로워져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지만 여전히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들어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3:14-15) 광에에서 범죄함으로 불뱀에 물렸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모세가 만든 구리뱀을 바라봤을 때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죄로 죽은 인생이 회복하는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고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그 때 생명을 얻은 것처럼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져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 설명하십니다. 모세의 그 불뱀 사건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지어다" 죄가 주장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진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있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영생의 길을 걷게 됨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죽으셨다가 죽음의 권세로부터 예수님을 일으키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가는 말
니고데모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믿음을 가진 것처럼 살아가지만 기적만을 쫓아다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도 우리의 삶은 기적만을 좇는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허락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죄가 아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삶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