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14(참고 골로새서 15-20)
들어가는 말
삼위일체교회력은 한 해의 시작이 창조절입니다. 8월의 무더위가 지나고 9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 맑고 푸른 가을 하늘과 더불어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한해가 새롭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우주의 이치이신 말씀, 곧 로고스의 천지 창조를 보여줍니다. 또한 이러한 로고스(말씀)가 사르크스(육), 곧 육을 입어 이 땅에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오늘은 재일동포선교주일이자 개척선교주일입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매년 9월 첫째 주일을 ‘재일동포선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제가 저지른 식민지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를 잊지 않고 지속하고자 함입니다. 현재 일본 정부는, 1910년 일본제국주의 당시 대한제국, 곧 조선을 침략한 이후(한일합병조약을 통한 국권피탈), 우리 땅에서 자행했던 학살과 수탈, 강제 징용과 성 착취 등에 대해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사과한 일이 없습니다. 특히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관동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당시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정부와 군대, 민간자경단들이 일본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재일 동포 6천 6백여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초창기 당시, 괴담이 퍼졌죠?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규모 8이 넘는 큰 지진, 그리고 곧바로 발생한 화재로 사망자가 10만명이 넘었고, 도쿄의 가옥 중 60%가 불에 탔습니다. 당시에는 TV나 라디오가 존재하지 않았고, 불바다가 된 시가지에서 신문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지진 피해의 전모를 파악하기는커녕, 극심한 혼란 속에서 여진, 화마와 투쟁해야 했던 사람들의 공포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때 지진이 발생한 날 밤부터 “조선인들이 방화를 한다.”라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 수백명이 집단으로 공격에 나섰다.”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심각해졌습니다. 극도의 불안감과 스트레스에 사로잡힌 일본 사람들은 스스로 조직을 꾸려 조선인 색출에 나섰고, 실제로 이 자경단이 수많은 조선인, 중국인 혹은 조선인으로 오인된 일본인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진실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죠? 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진실을 규명하고 사과를 받아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재일동포선교주일’이 창조절 첫째주일과 맞물려 유명무실해지고 있는데, 새로운 창조는 이전 것의 참다운 회개라는 바탕 위에서 이뤄지고 한일관계 개선 역시 가해자인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재일동포선교주일을 기억하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신(logos) 그리스도
본문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태초에 계신 말씀, 만물을 창조하신 생명과 빛으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는 로고스는 말, 언어, 가르침, 이성, 근거라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원래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우주의 이치나 질서’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치가 인간 속에 들어오면 ‘이성(理性)’, 곧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됩니다. 따라서 로고스가 사르크스(σάρζ),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우주의 이치가 인간의 이성 속에도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집니다. 스토아 철학은 코스모스라 불리는 세상이 조화롭다고 보았습니다. 이 조화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로고스라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로고스가 신(神)이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로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겁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 태초의 로고스가 인류 역사에 들어온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 구약의 잠언서는 이 로고스를 지혜와 연결시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지혜가 인간 삶에서 가장 수준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혜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잠언기자는 8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땅이 생기기 전,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 깊은 바다가 생기기 전에, 샘에서 물이 솟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22-24절) 잠언은 지혜가 먼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만물 이전에 지혜가 존재했다면 지혜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잠언은 하나님이 지혜를 ‘지으셨다.’라고 표현했지만, 지혜는 세상의 피조물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30절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되….” 지혜는 단순히 지성적이거나 똑똑하게 살게 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능력 자체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5-16)
생명의 빛이신 예수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그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요한은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이들이 근심, 걱정, 염려,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또는 허무와 절망에 휩싸여 있습니다. 끝없는 경쟁심으로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면 이런 현상을 좀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곳곳이 전쟁터와 같습니다. 생명 파괴와 훼손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생명의 빛을 상실은 인생의 모습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니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생명 충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해결되어야만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그분을 통해서반 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기에 그분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즉 세례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폭력과 불공정, 불평등 혐오와 증오와 같은 어둠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그곳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 회복하실 분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실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 역시도 예수님을 그런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보호받으며 그 안에서 온전하게 자라가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 곧 교회의 머리요, 구속주요,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는 화목주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창조주이심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교회는 결국 이치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 폭력과 불공정과 불평등과 혐오, 증오로 가득한 세상을 변화시킬 유일하신 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몸은 머리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어떤 물건을 잡으라는 명령은 머리의 핵심인 뇌가 내린다. 밥을 먹을 때 숟가락과 젓가락을 손에 쥐라는 머리의 명령을 손이 거부한다면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기능이 파괴된 것입니다. 정신과 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분리될 경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피조물이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골 1:18-19)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주의 이치이신 로고스, 곧 말씀이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우리가 남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남에게 양보하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거짓을 미워하고,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삶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창조주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진리가,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감으로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공동번역개정 골 1:20) 화해를 이루어 평화의 세상을 만들려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