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감사
누가복음 17:20-37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후 여섯번째 주일이면서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 감사절은 구약의 3대 절기의 하나인 맥추절을 계승한 절기이다. 유대인들의 추수 감사절이었던 맥추절은 히브리 원어로는 '하그 하카츠르'이며, '거두어 수확하는 절기'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추절은 한 해의 수확을 끝낸 기쁨 속에서 그 수확을 가능케 해주신 하나님께 기뻐하며 감사를 드린 축제였습니다. 동시에 인생의 모든 것은 오직 여호와께로만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심정으로 일상의 모든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재무장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날씨를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쨍쨍 내리는 햇볕으로 더위에 숨이 막히다가 어느순간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있기도 합니다. 지난 주에는 딸아이를 하고 시키기 위해서 나가려는데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아이 학교에 가니까 언제 비가 왔냐는듯 쨍쨍 해가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다보니 비가 또 쏟아졌습니다. 날씨가 변화무쌍해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코로나의 위기로 힘들고 어렵지만 이렇게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주의 날,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임하나요?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여호와의 날, 곧 하나님 나라의 시기에 관해 질문합니다. 예수님께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ἐντὸς ὑμῶν ἐστιν).”(눅 17:20-21)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재림의 징조들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종말 신앙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ἐντὸς ὑμῶν) 있다.”라고 말씀하시죠? ‘안에’라는 헬라어 엔토스는 마태복음 23장 26절에도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도 엔토스를 ‘안’이라고 번역합니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ἐντὸς)’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무슨 뜻이죠? 마태복음에서는 ‘안’을 ‘속마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는 ‘엔토스 휘몬’을 ‘너희들 속에(intra vos)’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속마음에 있다, 곧 ‘심령천국’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인 대부분이 하나님 나라를 일차적으로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것은 유교의 수양과 불교의 깨달음의 차원에서 우리 민족에게 자연스럽게 수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그 어떤 말씀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내면적인 것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기에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령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셨지만, 하나님 나라가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고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최병학목사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시는데요. "문법적으로도 엔토스는, 복수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복판에, 사이에”라는 뜻이 되기에, 사람의 ‘마음속’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으로 번역이 됩니다. 영어 성경이 잘 번역했습니다(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among you). 특히 당시에 헬라어로 기록된 다른 많은 문헌도 엔토스를 “~의 손에, ~의 권력 안에, ~의 수하에”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제대로 된 번역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이 만질 수 있게”, 또는 너희들의 “손안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너희의 지배 안에, 너의 가운데”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잡으려고만 하면 잡을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겨자씨 비유에서 보았던 것처럼, 지금 우리 눈에 겨자씨 한 알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모양으로 있지만, 땅에 심긴 후에는 크게 자랍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속마음을 넘어 우리들이 만질 수 있게 우리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438장 가사가 이것을 잘 표현합니다. 1절 가사를 보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고 합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죄 사함의 은총을 입으니, 이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것입니다. 곧 지금 우리 손안에 있는, 우리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이전에는 못 알아봤으나, 은총을 입고 죄의 짐을 벗고 보니,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깨달았다는 선언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심령도 평안하겠죠? 중요한 것은 무엇이 먼저냐 하는 것입니다. 전후 관계가 제대로 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노아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손안에 있었지만,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은총을 입지 못했습니다. 룻의 때에 소돔 사람들도 그들이 만질 수 있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다. 죄짐을 벗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고, 욕보이려고 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사고팔기에만 열중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눅 17:27-29)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심판의 유예를 믿고 세월을 허송하며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도적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후 3:10-11a)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같으리라
결국 하나님 나라가 손안에 있지만 깨닫지 못한 이들은 멸망 당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인간들 가운데 갑자기 임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인자의 날’로 이야기합니다. 인자의 날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죠? 개역 개정이 약간 오해하기 쉽게 번역이 되었는데, 공동번역 말씀이 제대로 잘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날을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저기 있다.’ 혹은 ‘여기 있다.’ 하더라도 찾아 나서지 마라.”(눅 17:22-23) 하나님 나라, 곧 인자의 날에 관해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하더라도 믿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곧 인자의 날이 한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자이신 예수님 자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 17:24).”
무슨 말씀인가요? 인자의 날은 한 장소가 아니라, 하늘 아래 이쪽에서 저쪽까지 모든 장소를 의미하며 통치자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장소에 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띤다는 말씀이죠? 그럼 인자의 날, 곧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우리 손에 있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은 무엇일까요?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5-26).” 사람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여 인자의 오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자가 고난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이죠? 따라서 그들은 멸망 당합니다. 롯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 사람들이 세상의 쾌락과 음행에 도취해 멸망 당한 것과 같이, 인자의 날도 그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인자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심판의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자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된 후에 다시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이와 같은 심판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눅 17:30-3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다시 오시는 날은 총체적인 멸망의 날, 파국의 날이기에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셨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본회퍼는 시편명상에서 "순종하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뻔뻔스럽고 거짓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복을 받는 사람만이 그것이 진실로 감사한 복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즉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약속을 믿고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사모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에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말씀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과거에 집착하며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노아와 롯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그것을 붙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갔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리고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과거에 머물러 있기에 자신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붙잡지 못하고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스바냐서는 이러한 모습을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스바냐 1:18) 우리는 약속의 자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며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 기회를 놓친이들과 같은 삶이 아니라 베드로의 말처럼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베드로후서 3:11하-12상)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듯 순종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인자의 나타날 때처럼 심판의 날이 기다릴 뿐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손이 닿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때의 사람들처럼, 롯의 아내처럼 죄악과 탐욕과 어리석음의 이전 모습을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추수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던 하나님의 그 모습으로, 여전히 모두가 회개하기를 기다려 구원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