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목적
고린도전서 1:4-9
들어가는 말
지난 주에 우리는 1-3절의 서언을 통해서 바울이 말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부름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졌고,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분쟁이나 다툼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함께 말씀을 나누며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묵상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 : 은혜(4절)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 χάρις)'입니다.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사용됩니다. "호의", "감사", "선물", "자비", "너그러움", "기쁨"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호의를 베푸심으로써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구원하신 자들에게 무한하신 사랑을 쏟아 부으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2의 말씀대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오히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으며, 이 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은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주어집니다. (로마서 12.3 6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수대로") 이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게하고 교회와 사회(세계)를 위해서 봉사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특정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는 풍족(부요)하게 합니다. : 은혜의 목적1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고린도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풍족(부요)해졌습니다. 그들이 모든 일- 언변과 지식-이 풍족(부요)해졌습니다.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이를 전파하기 위한 말재주를 제공하는 원동력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 곧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실재 위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새생명을 얻은 성도들의 언변과 지식에 풍족함은 그리스도의 증거를 성도 안에서 견고케하는 도구로 쓰였으며 이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지만 이차적으로는 이러한 사랑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존재 안에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의 선물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에 있어서 귀중하고 실로 필수적으로 수반됩니다.
'풍족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알고 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풍성히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그들 안에서 확고해졌기에 그들은 풍족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말과 지식은 우리를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풍성해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통해서 성도들이 말하는 것과 지식이 풍족해졌고 그로인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증거 가운데 굳건하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되었음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언에 확고히 서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그 결과로 영적인 선물을 부족함 없이 받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와 교제케 하심 : 은혜의 목적2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은혜의 선물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이며, 또한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취를 위한 도래를 고대하는 그의 역사적 활동을 통하여 구원받고 부름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룬 일을 회상하며 또 그가 앞으로 이루실 일을 고대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달려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인간의 불확실성과 특히 수많은 고린도교인들의 도덕적인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날에 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날마다 주의 재림을 고대하며,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까지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을 바라보는 자마다 현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분 앞에서 책임적인 삶을 삽니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것입니다. 그분의 오심을 바라는 자마다 그와 같이 될 것을 바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소망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중 아무라도 경건한 삶을 원한다면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의 시간은 필수입니다. 이것은 주변의 어떠한 상황에도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케 해줍니다. 많은 이들이 중도에 낙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믿음의 경주는 싸움이고 고난입니다. 이 시험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주께서 우리를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하실 것을 믿고 주님과 교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 모든 교제의 근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절)